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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Oct 11. 2021

심해어

일요일 오후, 오묘한 주말 특유의 분위기가 감도는 거실. 하루 내도록 켜져 있던 텔레비전에서 낚시 예능이 나오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은 좁디좁은 배에 옹기종기 서서 각자 낚싯대 하나를 손에 쥐고 오매불망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출연자가 월척을 낚으면 낚지 못한 출연자는 그를 부러워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도 했다. 망망대해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내다 끝내 건져 올린 물고기 한 마리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출연자들이 귀여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얻은 결실은 무척 달콤하다. 낚싯대가 휘어지면 휘어질수록 힘은 더 들겠지만 결과는 그에 비례하여 짜릿하다. 세상이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잔잔한 바다에 저마다의 낚싯대를 던지고, 그 결과는 각각 다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쉽게 쉽게 고기를 잡아 만선으로 돌아오지만, 누군가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누군가는 오징어 한 마리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대왕문어 10마리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시간이 충분한 사람에게만 힘이 된다.


팔딱팔딱 힘이 넘치는 참돔을 낚고 기뻐하는 출연자를 보면서, 저 큰 물고기와 싸우는 손맛은 얼마나 짜릿할까 궁금해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배 위에서 이리저리 꿈틀대는 참돔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물론 낚인 것은 참돔 잘못이므로 불쌍할 이유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왜인지 나도 저런 상황을 언젠가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마다 한 번쯤은 소위 말하는 '낚여'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황당함과 억울함이 고스란히 참돔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순간 불쌍하다는 감정이 올라왔던 것 같다. 물론 그 감정은 2초도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럽다'라는 감정으로 바뀌었지만.


괜히 수면 근처를 알짱거리다 바늘에 걸리고 마는 물고기들의 삶이 왠지 생존을 위해 허덕이다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같기도 해서 말이다. 사람의 간절함은 죽을 각오를, 죽일 각오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는 반드시 1명이고, 2등도 꼴등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죽기 때문에. 사람 많고 편안해 보이는 곳에는 반드시 경쟁이 있고, 덫이 있고, 누군가의 악랄한 의도가 담긴 흉기가 있기 때문에.


깊고 깊은 바다에 사는 심해어들의 삶이 부러워졌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설치한 그물도 없고, 미끼로 위장한 날 선 바늘도 없고, 상어나 고래도 없으니까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 아닐까? 사납고 독특하게 생긴 것도 개성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빛이 없으니 스스로 빛을 내고, 먹이가 없으니 먹이를 유인하는 놀라운 적응의 삶 또한 멋있어 보였다. 물론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남들과는 다른, 조금은 무섭고 다가가기 어려운 모습을 지녔지만 어쩌면 순하고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이것 또한 착각일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의 삶이 여유와 평화로 가득할 것이라고 속단했지만 어쩌면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감히 평가할 수 없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위협에 상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삶이 더 나은가. 어떤 모습이 더 아름다운가. 어떤 행동이 올바른 것인가. 어떤 죽음이 더 가치 있는가. 따위의 질문에는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약함과 강함도 상대적이며 어쩌면 그것도 우리의 편견일 수도 있다. 참돔이 불쌍할 이유도 없고, 그들에게 사회복지적 혜택이나 돌봄을 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모든 삶이 그렇고, 모든 삶이 흉기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모두가 흉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숨을 끊기에 충분한 날카로움은 이미 우리의 삶이 되었고 이미 익숙하며 무척 능숙하다. 또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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