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를 안아주는 것이 좋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도 좋다. 서로의 팔이 교차되며 전달되는 복잡 미묘한 온기와 설렘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요즘 같은 흉흉한 사회에서 누군가를 위한 품을 거리낌 없이 내어줄 사람은 몇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한 번만 당신에게 안겨도 될까요?’라고 묻는 것도 좀 이상하다. 그래서 난 인형을 좋아한다. 의사를 묻지 않고도 서슴없이 품에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형은 보잘것없는 내게 가장 따뜻한, 동시에 가장 차가운 품을 내어준다. 밤이 되면 세상의 어떤 빛나는 사람일지라도 혼자가 되지만, 인형과 함께라면 홀로 떠나는 꿈나라 여행도 외롭지 않다.
‘나는 왜 포옹을 좋아하는 것일까?’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답은 명확했다. 소심함과 주체성 박약. 나도 나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품을 의지하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마구 타오르는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난 넓고 넓은 가슴팍으로 도피했으며 그 뜨거운 열기에 나의 두려움과 망설임을 녹이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왜인지 나약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의 도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인생을 떳떳하게 설계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어리지 않지만 가장 어린 나이,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나이를 지나면서 우리는 홀로 서야 했고 자주 넘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것이 급변하는 21세기 사회를 온몸으로 버티면서 예측 불가능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세상은 그렇게 겨우 걸음마를 뗀 우리에게 갖가지 숫자를 부여했다. 그것은 액수가 될 수도, 점수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에 순위가 매겨졌으며 낮은 순위는 얄짤없이 외면되었다. 그 가녀린 숫자 하나가 우주보다 더 넓은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 충분한 척도가 되었다.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과 패배감은 나도 나를 믿지 못하게 했고, 누군가의 따뜻하고 든든한 품을 더욱 갈망하게 했다.
며칠 전, 2학기 중간고사가 한창이던 날이었다. 미적분 시험을 30분 남짓 앞둔 자습시간에 문득 상쾌한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자습을 하다 말고 사물함 위에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날씨는 완벽했다. 하늘은 지극히 하늘색이었고 나뭇잎은 지극히 뚜렷했다. 건너편 대천천에는 어르신 두 분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산책을 즐기고 계셨다. 수 초 동안 그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 아무 생각 없이 땅을 내려다보았다. 딱 뛰어내리기 좋은 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말 한마디가 나의 뇌를 정확히 관통했다.
“죽으려고?”
정신이 번쩍 들면서 긴장이 풀어졌다. 사물함 위에 서서 창밖으로 고개를 쭉 내민 내 모습이 아무래도 위험해 보일만 했다. 사물함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아까 내가 한 생각은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4층과 지면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였을까. 왜 나는 푹신한 흙바닥에 내 몸이 닿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충격량의 크기가 나에게 견딜만한지 고민했던 걸까. 그저 수학 시험을 30분 앞둔 사람의 흘러가는 가벼운 잡념 따위로 치부해도 좋은 걸까?
나는 까마득한 창문 너머를 보면서 여러 번 투신을 상상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죽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삶의 고통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으나, 죽음의 고통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수도 없이 매체를 통해 들려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투신 소식도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안아줄 수 없고, 누구의 품에도 안길 수 없는 삶. 의지할 인형 하나가 없어 허공에 몸을 맡긴 사람들. 고민에 고민을 반복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진 그들의 용기를 감히 평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무모한 용기가 존경스럽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무척 안타깝다.
지금 이 순간도 끝없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힘들면 뛰어내려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보란 듯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왜 너는 계단을 오르느냐고, 무엇 때문에 자신을 도려내면서 계단을 오르느냐고 묻고 싶다. 꼭대기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필사적으로 오르느냐고 묻고 싶다. 낙하하는 순간만큼은 속도감이 주는 시원함과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즐겼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그대로 머물렀으면 한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휘황찬란한 고층 건물이나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 피어난 작고 연약한 꽃 한 송이, 어떤 낯선 빛에도 고개를 내미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찢기고, 밟히고, 아스러질수록 자신만의 색과 향을 더욱 발산하는 꽃 한 송이가 모이고 모여 도시를 장식한다. 나는 여러분이 꽃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 짧은 봄날, 가장 높은 곳에 아름답게 피어났다가 이내 가장 낮은 길바닥으로 투신하는 꽃처럼. 오랜 시간 피워낸 순수한 꿈이 그렇게 짓밟힌대도 추운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다시 한번 꿈을 피워내는 꽃처럼. 계절의 반복은 꽃에게 새로운 삶을, 눈사람과 허수아비에게는 일자리를 선물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죽음은 그들의 존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우리의 삶에 반복되는 쓰라린 고통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 고통이 흑백 세상에 아름다운 색을 입힌다.
우리의 인생은 어느 유망한 젊은 작가의 첫 번째 소설과 같아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고통받는 것이 마음 아파 책을 덮어버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끝까지 읽지 않는 베스트셀러는 없다. 우리의 페이지가 어디에 있든,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편 페이지 위에 꽃 책갈피 하나를 끼우자.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견디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책갈피를 찾아 되돌아오자.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문장이었나 곱씹어보자. 꽃으로 피어나는 슬픔도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이 글은 제가
작년에 학교 백일장에서 썼던 글입니다
사실 고등학교 백일장인지라
최대한 행복하고 희망적인, 화사한 글을 쓸까 했는데
수상의 욕심보다는 어떤 일련의 메시지를 꼭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투신'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