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내리막에서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는 바퀴 같다. 눈 깜짝할 새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는데, 그 속도가 점점 붙는 느낌이다. 두루마리 휴지가 내리막을 내려갈 때 자신의 자취를 남기며 그 몸이 계속해서 야위어가듯, 시간은 흐르면서 우리와 우리 주변에 흔적을 남기는 동시에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1월의 첫날에는 모두가 저마다 계획을 갖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 같은 풍성함과 압도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르고 치이면서 테두리가 닳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어떻게 이른 아침의 길에는 절뚝거리는 사람 한 명이 없나. 세상 사람들은 전부 철인 같다. 전투태세에 돌입한 군인과 같은 비장한 표정으로 지하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몸을 싣는 그들은 흔들림 없는 견고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의 얼굴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에 오래도 구워진 도자기와 같이 겉으로 강하고 당당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모두가 지극히 약하고 위태한 존재였던 것이다. 많고 많은 도자기 중 완벽한 제품은 하나도 없었다. 은밀한 깨어짐. 정확히는 강요당한, 불가피한 깨어짐.
정신이라는 건, 마음가짐이라는 건, 노력이라는 건, 한계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고작 그것뿐이라 더 나은 정신과 태도와 노력을 요구한 것은 아니고? 답할 수 없는 세상의 모순에 누가 해답을 겨우겨우 도출해버렸을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한 발 물러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랍다. 불변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절로 감사가 튀어나온다. 방치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들 또한 저마다의 기원과 주소가 있으니, 세상 어느 것도 그저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하면 묘한 찌릿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참 재미있고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도 분명히 어떤 이유에 의해 존재하고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다들 잘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왜 살까?'라는 질문에는 단순한 답변 밖에 할 수가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버릇처럼 스마트폰에 충전기를 연결하면서 문득 나는 왜 충전기를 연결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란 놈은 내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서 스마트폰의 밥은 빠지지 않고 챙겼다. 철저한 집사의 태도로 스마트폰을 보필하는, 스마트폰이 배부르지 않으면 하루도 편안하게 살 수 없는 나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소탐대실을 기본 소양인 줄 알고 살아가는 비합리적, 비효율적 로봇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굉장히 난장판일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태풍이 헤집고 간 자리처럼 엉망진창인 상태로 삶을 연명한다. 우리의 삶은 매일 사진 한 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너무 높은 젠가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아슬아슬해지다 저 아래 까마득한 곳에 자리한 소중한 사진 한 장이 자리를 잃는다. 그렇게 위태롭게 기울다 한순간 무너져 흩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어서 다시 젠가를 올린다. 다시 무너지고 다시 흩어진다.
요즘 들어 지하철을 많이 탄다. 그러면서 열차에 탄 사람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는 한다. 사실 지하철 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박은 채 스마트폰을 보기 때문에 옆사람조차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난 자리가 있다고 해도 굳이 서있고 싶은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출입문 근처에 손잡이를 붙잡고 선다. 그러면 지하철 안팎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물론 외양이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고, 표정이 비슷하다.
지하철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빌런이라고 하는 요란하고 독특한 사람들은 기억에 안 남을 수가 없고, 휠체어를 타시거나 목발을 짚으셔서 이용에 불편을 겪으시던 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출입문 옆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던 젊은 분이었다. 늦은 시간에 지하철에서 잠을 자는 것이 특출난 일은 아닌데,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힘없이 늘어진 고개에서 여러가지를 느꼈던 것 같다. 나 또한 지쳐 있었지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고된 하루 앞에 엄숙해졌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에서 내렸지만, 파도치듯 계단을 쓸려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축 처진 고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여름이 왔고, 계절의 초입에서 다시 한 번 가슴이 시들어간다. 내 안의 열정이 한낮의 타는 듯한 열기에 무릎을 꿇는다. 더운 것도 모자라 얼마나 습한지 퀴퀴한 냄새는 떠날 생각이 없고,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일 빗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두통을 느낀다. 이해되지 않는 현실과 이해할 수 없는 미래를 비교하며 울고 웃고 망설인다.
그러나 감사하다. 잃으면서 얻는 것들이 너무도 많고, 고통과 숨막힘만이 주는 강인한 힘이 있다. 세상은 자신의 길을 의심하는 사람들뿐이라 겉으로는 모두들 어떤 확고한 목적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누구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모른다. 밤마다 눈물을 흘리지만 아침이 되면 눈물을 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지극히 푸른 하늘을 보며 상쾌함과 막막함이라는 풍성한 양가적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비록 무너진대도 오늘의 사진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우리는 너무 작은 별 같다. 우리 같은 별들이 모여 용맹한 별자리와 영롱한 은하수를 이룬다. 그 연약한 하나의 별의 찬란함이 세상을 든든히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성한 것 하나 없지만 무너지는 젠가를 덤덤히 받아들이며, 조각난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평범한 우리들의 비범한 삶을 사랑하자. 웬만한 아픔을 겪었으니 이제 우리는 파도가 되자. 먼 바다에서는 큰 배를 집어 삼키는 파란을 일으키고, 해변에서는 지친 사람들의 발목을 시원하게 적시는 물결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