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ife] | 어둠 속을 거닐다가 나를 찾다#1

나는 빛과 어둠으로 빚어졌다

by 사랑의 등대

이 이야기는 내가 어둠 속을 거닐다가,

나 자신을 사랑한 과정과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간 과정이다.


나의 이전 글들이 '빛과 어둠을 포용하고 사랑하라', '불편해도 자신을 마주 보고 솔직해져라',

'두려움을 맞서고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이런 말들이 큰 줄기이기에, 내가 나의

빛과 어둠을 포용한 과정을 보여주고 솔직해져야 독자도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한 발 다가

서고, 용기 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나의 이야기를 공개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제는 나의 일부를 감추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나의 의지이기도 하다.

두려움도 올라오지만 내가 공개된 공간에서 글을 쓰고자 했던 목적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래서 이전에 가족이나 연인, 친구에게도 공개하지 못했던 나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물론, 내가 어둠에 집어삼켜졌을 때의 내용이 독자에게로 하여금 충격과 부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어 다소 완화시키거나 비유나 은유로 표현하기로 한다.

나는 글에서도 폭력성이나 부정적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걸 안다.

나도 실제 글을 읽다 글을 쓴 사람의 폭력성이 느껴져 버리게 된 책도 있다.

어느 책에서 글쓴이가 겪은 힘든 상황을 읽다가, 내가 너무 감정이입을 해서

실제 악몽을 꾼 적도 있다.


나의 글을 소설책의 캐릭터의 삶을 지켜보듯이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상황을 통해서 내가 날 사랑하게 됐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게 됐고, 지금 돌이켜보니 나의 지구 삶에서의 설정 값이었구나를 깨닫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나도 그 당시를 다시 회상하며 글을 쓰려니 기분이 다운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글을 쓰는 걸 주저하는 나를 본다.

하지만 글을 작성하고 수정하고 추가하면서 점점 두려움이 옅어지는 나를 보기도

한다. 또 나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더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금 시점에서의 그 당시를 관찰하는 의견도 같이 언급할 테니,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지

말라. 너무 감정이 동화되면 그대로 잠자리에 들지 말고 꼭 기분전환이 되는 것을 하라.



자, 이제 그럼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시작해 보자.

...

..

.





#1


나는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 보면 아주 어릴 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던데..

난 뿌연 안갯 속이다. 일부분이 기억날 뿐이다.


사진첩을 보면 할머니와 같이 있는 사진이 많다.

젊을 때 잘생긴 아버지와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신 어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그렇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할머니가 날 돌보셨다고 한다.

정확하게 내가 몇 살 때 헤어지신 건지, 물어보진 않았다. 짐작할 뿐..

다 커서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는데.. 울먹거리셔서 묻기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어릴 때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린이 시절 때, 오빠와 함께 엄마 집에 가 있었던 것..

교회를 다니고 작은 방에서 열심히 기도했던 것..

엄마의 지도 아래 구구단을 외웠던 기억이 있다.

얼마의 기간이 지났을까.. 아버지가 다시 우릴 데리러 오신 것도..



어릴 때는 할머니의 보호 아래 지냈던 거 같다.

사진첩에서 보면 할머니가 마당에서 빨래를 하시는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고 있다. 할머니 껌딱지였던 거 같다.

큰집에서 지내는데,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는지 삐져가지고

방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푹 숙이고 관심받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경 써주지 않아 계속 그러고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난 할머니의 사랑이 있어서 이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도 힘드셨을 거 같다.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과 농사일을 병행하며 5명의 아들을 길러내셨는데

아들이 이혼해서 자식 둘을 부탁하셨으니 말이다.

내게 할머니가 어머니와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진 않았던 거 같다. 아니면, 경험하지 못해서 못 느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부터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같이 살았다.

새엄마가 바뀌기도 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아빠는 지금까지도 이사를 자주 다니시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싶다.

아빠는 그림을 잘 그리셨다. 어릴 때, 어느 공원에 돗자리 깔고 앉아

스케치북에 풍경화를 그리시는데 크레파스를 사용해서 수채화같이 표현

하셔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무슨 그림으로 돈을 버냐고 혼내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운전 직업을 택하셨다. 엄마 말로는 택시기사를 하시면서

돈을 많이 버셨는데, 본가에 돈을 자주 보내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방에서 건어물업으로 성공하시고 서울에 정착하셨는데,

큰아빠가 주식을 하면서 돈을 많이 잃었고, 아빠 돈도 상당히 잃게 됐다고

한다. 그게 이혼 사유 중 하나라고 하셨다.



| 여기서 느낀 점은, 자식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고 독립을 했으면 간섭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면 그 어깨가

얼마나 무겁겠는가~ 이것도 한국의 '효'문화에 비롯된 것이겠지만,

자식이 성인이 되어도 정신적/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하고 계속 서로

의존하는 방식으로 흐르게 된다. 서로의 어깨가 무겁다.

세상살이가 질퍽한 진흙같이 무거워진다.

한국에 실제 성인이 되어도 캥거루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겠지.

서로 자립하지 못하고 서로를 갉아먹는다.



그리고 아빠는 자신이 말을 할 때 더듬거리는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나서는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평상시에는 말 잘하시고 어쩌다가 한번 그러

시는 거 같은데.. 자신의 취약점을 너무 크게 보시는 거 같다.

택시 일 이후로 오랫동안 버스운전을 하셨는데, 그 일을 힘들어하셨던 거 같다.

새벽 일찍 나가셔서 자정 가까이에 들어오셨고 하루 일하고 하루 쉬시거나,

이틀 일하고 하루 쉬기도 하셨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셔서 이사를

자주 다니셨던 건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실이 갑갑하고 답답하셔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이사'로 발현되었던 건가?



아빠는 집을 사지 않으셨다. 큰아빠를 통해 주식을 알게 되셨는지,

투자를 해야지, 돈을 깔고 사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다.

문제는 돈을 계속 까먹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갈빗집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셨는데, 주식에 투자해서 잃으셨는지

작은 집으로 이사 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신 적도 있다.



그리고 어릴 때, 아빠가 집에 강아지를 데려오신 적이 있는데..

난 학교를 다녀와서 소파 밑에서 강아지 다리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강아지 다리를 쭈욱 잡아당기니 귀여운 강아지가 더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 나왔다.

강아지랑 같이 공원을 달리기도 하고, 소파에서 강아지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서로의 숨을 느끼며 자기도 했다. 그렇게 강아지랑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보니, 강아지가 없다.

물어보니 방에 자꾸 배변을 해서 다시 갖다 줬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강아지의 단점까지 끌어안아주지 못했던 거 같다.

자신에게도 그렇고, 자식에게도 그런 것처럼..



아빠에게 부탁해서 피아노를 배우러 간 적도 있는데..

배운 지 몇 달이 됐을까,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로 넘어가려는데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했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게, 현관 외부에 계단이 있는 집에 산 적이 있는데

누가 사온건지 몰라도 장미같이 빨간 꽃 화분이었다.

꽃에 애정을 주며 벌레가 생기면 분무기로 쏴서 제거해 주고

잘 크고 있나 확인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화분이 없다.

아빠에게 물어보니 벌레가 생겨서 가로수 화단에 심어줬다는 것이다.

자라면서 이런 일들의 연속이었던 거 같다.



내가 커서 직장생활을 오래 유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했던 게, 어릴 때

잦은 이사와 뭘 시작하고 끝까지 해내는 경험을 못해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복되는 패턴에 나 자신을 탓했는데 지금은 알고 보니

꼭 그것 때문이 아니고, 내가 진정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안다.




| 자식을 소유물로 보거나 부모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있으니 내가 가르쳐야 할

미숙한 아이로 바라보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해 주고 대화 소통을 하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주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끌어

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에게 '내가 부모에게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존중받고 보호받고 있구나'를 느끼게 하고, 그것이 아이의 무의식에 밑받침 생각

으로 자리 잡게 해준다. 그리고 어떤 것을 시도해 보고 끝까지 해보는 경험, 실수

하거나 실패해도 그게 좌절할 일이 아니고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괜찮다고

다시 시도해보라고 격려해 주고,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자존감 형성에 도움이 된다.


아이에게 부모의 말이나 행동, 세상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문제/감정처리방식, 부모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그대로 흡수된다.

자신이 존중받고 있는지 아닌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는지 아닌지,

다 느끼고 있고 부모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으로서 자신을 바라보고

그 방식대로 자신을 대한다. 앞으로 나아갈 세상을 부모에게서 복사,

붙여넣기한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자식이 어떤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하고 싶은가?




우리 집은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말대답도 허용되지 않았다.

아빠가 결정하고 항상 통보식이었다.

군대를 안 갔지만, 군대식 문화 같았다. 명령과 복종..

그래서 어릴 때, 이사를 수십 번 갈 때마다 난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곳으로 전학 가서 또 적응을 해야 했다.

내게 의사를 전혀 묻지 않으셨고 이유를 설명해주지도 않으셨다.

난 영문도 모른 채, 지시에 따라야 했다.



어릴 때, 내가 보던 아빠의 모습은 화를 내시고 표정과 눈빛이 험악해지고

맘에 들지 않을 때 우릴 때리기도 하셨다. 오빠가 더 많이 맞았긴 했지만 말이다.

난 아빠의 화난 표정이 무서워서 말을 잘 듣고 착한 아이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의 강압과 통제의 교육방식은 날 청개구리로 만들었다.

어쩌면 이 특성도 지금 내게 필요한 항목이었기에, 훈련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머니에게 물어봤던 적이 있다.

"할머니는 사랑이 많은데.. 아빠는 왜 그래요?"

할머니는 아빠를 가질 당시, 6.25 전쟁 때라 맨날 불안과 공포 속에 있었다고 하셨다.

'아, 그래서 그런 건가?'

그리고 또 할아버지가 엄하셨던 거 같기도 하다. 사촌동생들 말을 들어보면,

다들 큰아빠, 작은 아빠에게 맞았던 경험이 있었다. 할머니가 시집살이에

농사일에 바쁘셔서 다섯 아들을 다 챙길 수 없었겠구나 생각했다.



아빠가 내게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삶은 절벽 끝 낭떠러지와 같아.'


아빠에게 삶이 그랬었나 보다..



|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 가정환경 속에 있었기에..

내가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받아봤으니 더 조심하게 되는 것처럼..

타인의 감정을 세심히 살피고 느끼고 공감하고 배려하려는 특성이 발달되고

누군가가 통제, 강요를 하려 하면 청개구리가 되고 자유를 갈망하는 특성이 발달

된걸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리고 이제 와서 보니 아버지의 고통과 상처가 느껴진다.

아버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구나. 자신의 취약점까지 끌어안지 못했구나.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구나. 삶이 외롭고 고단하고 무거우셨겠구나 싶다.

그래도 우릴 버리시지 않으시고, 진정 원하는 일을 하지 않으시면서도 자리를 지키셨구나

싶어 무척 감사드린다. 아버지 맘 속 깊은 상처에 후시딘을 잔뜩 짜드리고 반창고를

붙여 드리고 싶다. 사랑합니다.








나는 어릴 때는 공부를 곧 잘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100점을 자주 받아왔다. 받아쓰기도 잘했다.

그리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로 상도 받았다.


한 번은 아빠가 영어교과서 몇 쪽을 암기하게 하셨다.

난 맞을까 봐 무서워서 다 외웠다. 아빤 놀라워하셨다.

그 일 때문인지,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내가 똑똑한 줄 아신다.


| 아이에게 결과중심의 칭찬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결과를 칭찬 하면 어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실패하면 쉽게 좌절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안 할 수도 있다.

결과보단 과정을, 노력을, 자세를 칭찬해 주자.



...

그리고 국민학교 6학년 즈음인가,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 아빠와 새엄마는 가게를 하고 계셨고 집에 오빠와 단둘이

있었던 적이 많았다. 오빠의 성적호기심이 나로 향했다.

그때 난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고 놀이로 받아들였던 거 같다.

기분이 찜찜한데 잘 모르는 상태.. 옳은 행동이 아닌 거 같은 느낌..

물론, 오빠도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고 호기심에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빠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날 할머니 집에 보내셨다.

그 당시 가게를 하시다가 주식투자를 하고 돈을 잃어서

작은 곳으로 집을 이사하게 되어 보내신 걸 수도 있다.



난 할머니집에 가서 잘 지냈다.

가까이 사는 사촌동생이 자주 놀러 와서 친구처럼 지냈다.

중학교 진학하고 나서, 왜인지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지금 와서 유추해 보기로는 죄책감이 짓누른 거 같다.

아님 공부가 어려워서 손을 놓았던 걸 수도 있고..


그리고 그즈음.. 할머니집에 개미가 보여서인지 결벽증이

생겼다. 이태리타월로 이틀에 한 번이었나 때를 밀었던 거

같다. 팔꿈치 안쪽이 뻘겋게 반점이 생겨나는데도 말이다.

내가 쓰던 빗을 친구나 친척동생이 쓰면 씻어서 사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됐다.

미용실에서 헤어컷을 하는데, 미용사가 쓰는 빗이 매번

씻어서 사용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니까..

저절로 결벽증이 중화되긴 했다.



아빠는 내가 할머니집 가서 공부를 안 한다고 생각

하셨는지, 내 속도 모르고 내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중2~3학년 때 다시 집으로 끌고 내려오신다.



집으로 돌아와서 오빠와는 데면데면하고 서로 거리가 있었다.

서로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나는 학업에 뒤쳐져서 상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부모 상담을 왔던 아빠의 말이 기억난다.

"좀 열심히 하지 그랬어."



성인이 돼서 어느 회사 면접을 사장님이 직접 보시는데

내게 물었던 적이 있다.

"왜 이때 학업을 소홀히 했나요?"

나는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나도 내가 왜 그랬었는지,

왜 갑자기 흥미를 잃게 됐는지.. 나도 몰랐다.



오빠와는 커서도 여전히 데면데면하고 거리가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빠도 죄책감을 느꼈던 거 같다.

오빠 때문이 아닌데.. 내가 우울 상태에 있고 백수 생활이

길어지고 할 때, 들여다보고 챙겨주려고 했던 거 같다.




| 그 나이 때, 성적호기심이 생긴다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어릴 때 미리 피상적이지 않은 실질적인 성교육을 해주고, 성적호기심이

운동 등으로 건강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주고 신경을 써주

는 것이 중요할 거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성적수치심, 죄책감 등이 나의 여정을 걸어 나갈 때

필요했던 설정값이었나 보다 생각한다. 이 가정에 태어나고 이 가족들을

만나고 그런 경험을 했어야만 됐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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