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선택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 속 내용이나 대사들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메릴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작품인데,
4일 동안 영혼 끌림의 강력한 사랑을 하게 되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내용인데..
거기서 남주가 이런 말을 한다.
" 이렇게 강력한 감정은 인생의 한 번 겪게 된다"
그러나 여주는 가정이 있었기에 결국 자신의 행복보다 남겨진 남편과 자식들의 미래가 걱정되어
새로운 단계로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게 꼭 내 얘기 같긴 했다.
자신보다 가족을, 타인을 더 걱정하고 결국 자신을 잃는 것..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자신보다 남의 행복을 더 생각한다.
우린 왜 내가 원하고 바라고 하고자 되고자 하는 일에 관심 갖기보다
남이 원하고 바라고 하고자 하는 일을 더 살피고 신경 쓰고 관심을 두게 된 걸까?
끊임없이 타인을 신경 쓰고, 외부에 관심을 두고, 외부의 콘텐츠를 보는 것도 같은 괘일까?
왜 내가 원하고 바라고 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죄책감이 되고 미안함이 되는 것일까?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까?
우주의 모든 것은, 모든 에너지들은 변화하고 확장하고 변형되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우린 왜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새장에 가두고 고여있으려고 하는 걸까?
누가 우리에게 그걸 안전한 것이라고 한 걸까?
왜 확실한 게 옳다고 생각하게 했을까?
우리가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고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걸 통제하려 하니 머리에 쥐가 나고 화가 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니, 하염없이 외부에 신경 쓰고 관심 두고
자신의 의식을 마비시키려는 듯이 외부를, 타인을 관찰하고 있는 것 아닐까?
게임이나 끊임없이 콘텐츠를 보는 것이나 음식 중독이나 자기 파괴적인 패턴이 나오는 게 아닐까?
외부를 관찰하는 시선을 방향을 바꾸어 자신을 덤덤히 관찰할 수 있다면,
자신을 중심으로 삶을 관찰할 수 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보면서 신기했던 것이 있는데,
내가 했던 말이 대사로 나왔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의중을 살펴 힘든 상황일 거 같은 때에는
칼같이 선을 긋거나 그 상황을 떠나보내기가 곤란해서 일기장에..
'하나님,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요?'라고 써놓은 게 있는데,
이 영화의 여주 메릴스트립이 운명의 사랑을 만나고서 결국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했던 말이..
"내 가족에게 너무 가혹한 일 아닐까요?"
나랑 똑같은 단어를 구사해서 놀랬다.
물론, 번역된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여주는 자신에게 가혹하기로 결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