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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열 May 28. 2018

빈자리의 무게

인도 콜카타 - 마더테레사 하우스


 바라나시에서 콜카타로 이동하는 길 위에서, 마더테레사 하우스에 찾아가 봉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봉사자 등록 및 오리엔테이션 참석을 위해 주소지로 찾아갔다. 마더테레사 하우스는 어떤 사람들을 돌보냐에 따라 여러 부속기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시슈바반>은 정신발달에 장애를 가진 아이들, <프렘단>은 건강상태가 나쁘지 않은 정신 지체 노인을 돌보는 곳이었다. 수녀님은 현재 어딜 가든 봉사자가 모자란 상황이라고 말했다. 갠지스강의 여운이 워낙 진했던 탓인지, 임종을 앞둔 노인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깔리가트>라는 곳에서 일을 돕기로 했다.


 봉사 첫날, 옥상에서 빨래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군대 내무실을 연상시키는 널찍한 평상 두 개가 복도를 사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중병에 걸리거나 크게 다쳐 세상을 떠날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신음소리가 깔려있는 곳이었다. 한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팔과 어깨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느다란 팔과 얼룩진 피부는 그의 힘겨운 생애를 대변해주었고, 그의 눈빛은 한없이 처연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때론 내게 뭔가를 물어보거나 부탁하려는 듯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힌디어만 쓸 뿐, 영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할 수 없었다. 바디랭귀지조차 거의 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눈빛으로 공감을 표현하려 노력할 뿐이었다. 하루 종일 이 답답한 곳에 누워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은 굉장한 고역일 것 같았다. 비록 요령 없는 시시한 실력이었지만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최선을 다해 마사지를 했다. 



 대부분 스스로 거동할 수 없는 사람들인지라 대소변을 있는 자리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경우엔 세면장으로 옮겨 뒤처리를 하고 바지를 갈아 입혀드려야 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위치를 편히 옮길 수 있도록 잘 돕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 외에도 할아버지들의 요구사항은 끊이질 않았는데 대체 뭘 도와야 하는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할아버지가 소변통을 달라고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한참 손짓 발짓하다가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물이나 수건 등 엉뚱한 물건을 갖다 놓는 식이었다. 시간이 약이었다. 인도인 봉사자를 붙들고 귀찮을 정도까지 물어보며 체계를 익혔다. 며칠 하다 보니 눈칫밥이라는 것도 생겼다. “물” “화장실” “아프다” 와 같은 힌디어 몇 개를 외우고 나니 점차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일이 익숙해지자 그제야 사람 한 명 한 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모두 달랐다. 나를 보며 계속 울기만 하던 어떤 할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양 팔을 뻗었다 이마에 갖다 대는 동작을 천천히 반복하곤 했다. 며칠 뒤에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온몸이 너무 아파 어떻게 해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택한,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이기 위한 루틴이라는 말을 듣고 왈칵 눈물이 나온 적도 있다. 가끔씩 물을 떠다 드렸던 다른 할아버지는 영어를 조금은 구사했지만 악센트가 생소해서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내 손을 잡고 그곳에선 찾기 힘든 맑은 눈으로 ‘지저스’라고 말하곤 했다. 감사한 마음에 팔을 꽃봉오리를 쥐듯 조심스럽게 잡았는데, “악!” 비명과 함께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는 반응에 크게 놀란 적도 있다. 그는 종교의 힘으로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한 번은 침상 끝 쪽에서 카드놀이를 구경하는 할아버지에게 가서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다. 침울한 눈빛에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 하늘을 가리켰다.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사람임을 내게 말하려는 듯 보였다. 그 옆에 카드놀이를 하던 다른 할아버지를 가리킨 뒤,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자신과 마찬가지 운명임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다. 다 괜찮을 거라고, 오래 사셔야 한다고 애써 말하며 어깨를 주무르고 등을 쓰다듬어 드렸다.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가보라는 그의 느린 손짓에선 아주 조금의 희망조차 느낄 수 없었다. 절망의 검은 그림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진해질 뿐이었다.


 유독 마른 체구에 배가 복수로 가득 찬 할아버지가 날 힘들게 불렀다.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로 가져갔다. 오른손으로 조금씩 압력을 주며 배를 마사지하고, 왼손으로는 다리나 명치 언저리를 마사지했다. 그가 이따금씩 눈썹 옆 혈관이 돌출될 정도로 눈을 크게 부릅뜰 때면 통증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그럴 때면 두 주먹을 손톱이 부러져라 꽉 쥔 채 하늘로 추켜올렸다. 이를 악문 채 “메디슨"을 외쳤다. 수녀님에게 다급하게 뛰어가서 약이 필요하다고 말해봤지만 냉랭한 답변만 돌아왔다. "이미 진통제를 처방했고, 일반적으로 배 마사지는 하지 않아요.” 죽음과 고통이 일상인 곳이고, 열악한 환경일수록 원칙이 중요할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허탈했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었다. 통증이 조금이라도 덜하도록 원칙에서 벗어난 배 마사지라도 하는 수 밖엔.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오면, 날 위해 기도해주던 할아버지의 자리도, 카드놀이를 구경하던 할아버지의 자리도, 배가 부풀어 오른 할아버지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처음 그 부재를 겪었을 땐 가슴이 철렁한 나머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병원이나 다른 더 좋은 시설로 옮겨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히 말해 그렇지 않다는 걸 반복하여 깨닫는 시간이었다. 여기 누구도 조용히 자리를 비운 사람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빈자리는 오래가지 않아 낯선 누군가를 새로이 맞아들이고, 그 옆 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덩그러니 남는다.


 한 명 한 명 삶의 굴곡과 그들이 눈을 감는 순간까지 견뎌야 했던 고통의 흔적이 화석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곳. 이보다 빈자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곳이 어디 있을까. 이들을 위해 마더테레사 하우스를 짓고 평생을 사람을 돌보는데 몸 바친 테레사 수녀의 숭고한 정신, 그리고 그 명맥을 이어오는 수많은 봉사자들의 선한 의지가 그 무게를 지탱해 왔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엔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는 건강한 신체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 낯선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오히려 그 감사함을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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