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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열 Jan 13. 2019

마드리드의 크리스마스 선물

스페인 마드리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다른 비행기도 아니고 스페인에서 대서양을 건너 페루로 향하는 중요한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이 전까지만해도 모든게 완벽한 마드리드 여정이었다. 한인민박에서 좋은 형, 누나, 동생들을 만나 보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모두 부족함 없이 즐겼고, 민박집에 있던 8살짜리 꼬마 여자애와도 정이 들어 손수 만든 목걸이와 바람개비도 선물 받아 고이 챙겨왔다. 한인민박에서 공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1시간 동안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을 되새겨 보았다. 유럽여행을 다니는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이 예산은 부족하고 보고 싶은 건 많았기에 일정을 빡빡하게 짰고, 그 전 중동 여정을 소화하며 너무 자주 앓아 누웠기에 유럽에서는 아프지 말자고 매일 매일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제 치열하고 전쟁같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남미에서는 좀 더 쉬엄쉬엄 다니자고 생각했다. 난생 처음 온 유럽에서 그 독보적인 화려함에 매일같이 감탄 또 감탄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다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남미는 또 어떤 색다른 경이로움을 선사할지 기대감은 점점 부풀어 갔다.


 어느새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 공항 4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제 갈 길 바쁜 인파들로 가득했다. 먼저 체크인 카운터를 찾아봤다. 출발 2시간 전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타야할 오후 12:45 리마행 비행기는 항공편 목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화면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전산상의 오류가 있는 것 같았다. 슬슬 초조해져서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 물어보니 내 항공권에 찍혀있는 이베리아항공이 아닌 LAN항공 카운터로 가라고 한다. 안내 받아서 찾아간 카운터는 불이 꺼져있었고, 다시 한 번 헤매던 와중에 다른 쪽에 체크인 카운터가 오픈된 걸 뒤늦게 확인했다. 서둘러 가보니 이미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불평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줄을 서 있었고 덕분에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땐 출발시각까지 45분 정도 남아있었다. 별 일 없겠지 생각하며 여권을 내밀었지만 "너무 늦어서 탑승 불가합니다." 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뭐라고요? 안된다니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몇 번을 되물었다. 내 여행 일정은 이후에도 꽉꽉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이번 비행기를 놓치면 모든게 꼬이는 상황이었다. 이를 강하게 어필하거나 조르기도 해봤지만,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던 체크인 담당 직원은 동정 반 단호함 반이 섞인 말투로 기계적인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망했다.” 라고 중얼거리며 공항 내부를 정처없이 방황했다. 황당함은 점차 분노로 바뀌어갔다. 억울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공항 내에 있는 LAN항공 사무소를 찾아갔으나 내가   있는 가장 빠른 항공편이 14일이나 후인, 그것도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은    죽이는 확인사살이었다. 이후 리마-상파울로, 상파울로-부에노스아이레스 등등 줄줄이 이어진 항공편 일자를 일일이  조정해야 하는  차라리 문제도 아니었다. 가장  문제는  평생 다시 가기 어려울법한 남미에서 보내려고 계획한 한달  , 1/3 허무하게 날린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물가 비싼 유럽에서 보름이나  있는다면 안그래도 타이트한 여행 예산은 훨씬  부족해질  밖에 없다.


 당시에는 억울함과 분노와 절망으로 알아챌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 생각해보니, 결론적으로 이 비행편을 놓침으로써 세 가지나 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선물

 모로코라는 새로운 발견과 더불어 초등학생 시절부터 동경했던 사하라 사막을 가 볼 수 있었다. 예산 문제로 스페인에 더 머물기 보다는, 가까운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 다녀오는 것으로 빠르게 계획을 수정하였다. 이국적인 전통 시장의 마라케시, 모로코의 산토리니 섬이라는 쉐프샤우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미로의 도시 페스까지, 가는 도시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개성이 뚜렷한 여행지였다. 해의 고도에 따라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으로 변하는 고운 모래알로 지평선을 뒤덮고 있는 사하라 사막의 풍경과 그날 밤 쏟아질 듯한 별 무리가 수 놓는 광경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사하라 사막


 #두 번째 선물

 마드리드에서 서로 인사만 하고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이였던 아는 여자사람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멀고 먼 타지에서 때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덕분인지, 짧은 시간이나마 서로의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고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 전에는 이 친구가 차가운 인상을 가진 강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해왔지만, 대화해보니 마음이 무척 여리고 상대방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성격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평소 사람의 성향을 빠르게 파악한다며 자부했던 내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람을 볼 때 겉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마드리드의 크리스마스 트리


 #세 번째 선물

 비행기를 놓치고 정확히 2주 뒤 다시 찾아온 바라하스 공항, 여전히 여행객들로 바글바글했고, 한참 줄을 서서 체크인을 했는데 좌석은 게이트에서 확정 받으라며 좌석 번호 없는 항공권을 받았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제 미국 항공기 테러 시도가 있었다는 뉴스가 크게 보도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짐 검사도 40분 이상 기다린 끝에 통과할 수 있었다. 출국심사장도 북새통이었고, 비행기를 놓칠까봐 초조한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물론 비슷한 신세였던 내 표정도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나서야 겨우 출국심사를 마쳤다. 저 끝에 있는 게이트를 향해 뛰어야 했다. 게이트 입구에서 줄 서 있던 사람들이 탑승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직원은 내 항공권에 좌석을 적어주었다. 하지만 내 좌석에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앉아있었고,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고 나 혼자만 기내 화장실 앞에서 자포자기한채 서 있었다. 이 재수 없는 날을 기록한다며 기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승무원은 내 항공권과 여권을 계속하여 확인하더니 15분 뒤, 결국 날 비즈니스 석으로 안내하였다. 무려 12시간의 비행인데 말이다!  


난생 처음 비즈니스석


 당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어서 이 같은 전화위복을 미리 알았다면 과연 공항에서 그렇게 씩씩대고 화내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을까?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에 불평하고 멈춰서서 좌절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 장애물을 넘어갈지만 집중하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이런 생각지도 못한 더 훌륭한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이토록 멋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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