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모라이 & 살리네라스
페루 마라스라는 도시에 도착한 시각 오후 3시, 여기는 산 속에 위치한 염전이 있다는 살리네라스와 잉카제국의 고대 작물 연구소라는 모라이를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다. 금세 네다섯 명의 택시 기사들이 다가와 협상을 시도한다. 한 기사 아저씨는 반나절동안 택시를 대절해서 모라이와 살리네라스를 돌아보고 싶다면 50솔을 내야 한다고 했는데, 시세를 몰랐던터라 일단 너무 비싸다고 둘러댔다. 다시 이 정류장에서 쿠스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그 아저씨는 대답 대신 다른 승객들을 태우고 휙 떠나버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친구가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모라이, 살리네라스 염전 코스 50솔!”이라며 끈질기게 날 설득하고 있었다. 서로 기분 상하지 않는 선에서 35솔까지 깎을 수 있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 이름을 ‘호세’라고 알려줬다. 젤을 발라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스타일에 거무잡잡한 피부였다. 흰색 피케셔츠를 입어서 그런가 고등학생처럼 앳되어 보였다. 내게 학생이냐,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고나선 대화가 뚝 끊겼다. 호세는 막 마라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맨 처음 내게 "Do you speak Spanish?" 라고 물어봤던 친구였다. 발음도 좋고 가격 흥정할 때도 의사소통에 어려운 점이 없었는데 이게 웬 걸, 생업에 필요한 생존영어를 제외하고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것이었다.
늦은 오후인지라 모라이와 살리네라스라를 서둘러 돌아보고 다시 쿠스코행 버스를 타러 돌아가는 길, 수중에 잔돈이 없었기에 호세에게 100솔 지폐를 내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는 말 없이 차를 길가에 세우더니 45솔을 달라고 했다. 아니, 아까 35솔로 하기로 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정색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협상했는지 당시 대화 그대로 재연까지 했다. 다행히 이 방법이 통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잔돈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50솔과 20솔 지폐를 내게 건네줬고, 난 5솔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렇게 잘 끝난 줄 알았는데 호세 반응이 여전히 이상했다. 계속 40솔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돈을 더 달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 미리 합의한 금액보다 것 보다 더 많은 요금을 부른 전력이 있어 믿을만한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리 나쁜 사람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꾹 참고 천천히 설명했다. “자 내가 처음에 너한테 100솔 지폐를 줬잖아. 그리고 네가 50솔과 20솔 지폐를 돌려줬어. 그리고 내가 다시 5솔을 네게 줬지. 그러니까 결국 처음에 얘기한 35솔이 맞는거야.”
하지만 호세는 어느새 시동까지 끄고 너무나도 진지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계속 뭐라뭐라 외치다가 눈을 있는대로 크게 부릅뜨고 외치기 시작했다. “뽀르 미! 뽀르르 미!”
스페인어 특유의 발음으로 혀를 잔뜩 굴려 “For me!” 라고 말한 것이었다. 자기를 위해 팁을 달라고 계속 조르는 것 같았다. 대체 여기서 이 친구랑 왜 이렇게 시간낭비를 해야 하는건지,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손짓 발짓과 함께 계속되는 팽팽한 대치 상황, 마침내 호세가 100솔 지폐를 처음부터 아예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말에 내 인내심도 기어이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나 학생이고 돈 없으니까 이런 걸로 장난치지 좀 마. 내가 처음에 100솔 줬잖아. 제발 그냥 가자, 쫌!”
그는 입술을 앙다문채 미간을 찌푸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막무가내인 녀석에게 걸린거지? 이 부당한 요구 앞에서 뒷걸음질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내가 처음 돈을 건넬 때 당시 상황을 재연해보였다.
“자, 내가 또 설명한다. 내가 지갑 안에 200솔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까 너한테 100솔을 줬지? 그러니까 내 지갑에 100솔만 남아있어야 하는거라고. 자 이거 봐." 하면서 지갑을 여는 순간,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지갑 안에는 200솔이 그대로 들어있었어.
지금까지 7개월간 여행하면서 수 많은 사기꾼들을 겪어왔다. 웬만한 사기수법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다며 자신감 넘쳤던 나인데. 호세가 100솔을 받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걸 보며 속으로는 ‘또 뻔한 레파토리군.’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는데 말이다. 호세를 보는 내 눈엔 이미 붉은 색안경이 쓰여있었고, 빨갛게 보이는 그 친구가 하는 말은 내 귀를 지나칠 뿐이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네 의도는 불 보듯 뻔해.” 와 같은 편견을 가지고 날 위해 운전해 준 친구를 사기꾼으로 매도하다니.
순전히 내 실수인 걸 깨달은 뒤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행동은 호세를 두 팔로 껴안았다 놔주었다 하며 그저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봐.” 말하는 것 뿐이었다. 사과를 해도 민망함은 가시질 않고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호세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가 계속 웃으며 사과하자 얼굴이 아주 조금은 좋아졌다. 마침내 그가 “너 미쳤어.” 라고 답하며 슬그머니 웃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이런 논쟁이 생기면 등을 돌려 내 지갑부터 먼저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또다시 멀쩡한 사람을 나무라는 똥 묻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