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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열 Mar 22. 2018

죽음을 축복합니다

인도 바라나시


 인도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이동하는 침대 기차에서 결국 몸살이 난 것 같다. 그간 강행군에 좁디 좁은 3층 침대에서 잠을 설쳤더니 결국 탈이 난 모양이다. 바라나시 역전의 광경은 여전히 인도스럽다. 검은 연기를 내뿜어대는 낡은 자동차와 오토릭샤, 달구지를 끌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소, 제 갈 길 바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엉켜있다. 덕분에 흙바닥에서는 쉴새 없이 먼지가 풀풀 난다. 오토릭샤를 잡아 타고 갠지스 강 부근으로 이동했다. 기사는 길이 좁아 안쪽으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나더러 알아서 찾아가라고 하더니 태연하게 떠났다.


 복잡한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맨 끝에 간신히 숙소를 잡았다. 극도로 지쳐있던 탓에 씻지도 않고 침대가 마치 바위절벽인것 마냥 기어올랐다. 얼마나 잤을까, 40도의 더운 날씨에 땀범벅이 되었지만 오한까지 찾아와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침낭을 덮을수도, 선풍기를 틀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다. 바라나시에 오면 누구나 한번쯤 앓는다고 하더니 나도 정말 그랬다. 끙끙대는 중간 중간 쓴웃음이 나왔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갠지스 강변을 따라 걸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마약을 권하는 힘이 넘치는 헤어스타일의 청년, 손을 내밀어 악수부터 청하는 마사지사, 1달러를 외치는 꼬마, 바닥에 널린 소 배설물을 헤쳐 가야 했다. 갑자기 고약하고 불쾌한 냄새가 확 풍겼다. 옆을 보니 부패한 상반신만 남은 시체가 강을 따라 둥둥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코를 막고 용기를 내 자세히 살펴봤다. 얼굴은 이미 뭉개져 형체가 없었다. 한 쪽 팔도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걸까?




 시체를 보고 기겁했던 마음은 금세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보트 투어를 예약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반, 철수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인도인 가이드에게 갠지스 강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갠지스 강을 따라 왔던 길을 돌아가면 길 끝에 화장터가 있다고 하였다. 화장을 위해서는 나무장작을 위한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장작의 양에 따라 우리나라 돈으로 약 2만원부터 10만원 이상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장작이 부족한 경우, 시신 전부가 충분히 타지 않더라도 그대로 강에 흘려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와 같이 시신의 일부를 보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라고 했다.


 이 곳 사람들의 삶의 최종 목적지는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신성한 갠지스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야만 <이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환생하지 않고 영원히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평생의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해야 할 경사였던 것이다. 화장터에 직접 가보았다.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죽음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슬픔과 무력감을 주입하는 절대적인 권위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곳 바라나시에, 죽음을 친구처럼 여기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화장터에 좀 더 가까이 가 보았다. 커다란 천에 싸인 뻣뻣한 여성의 몸이 장작 더미에 올려졌다. 나무를 몇 단 쌓아올린 후 그 위에 몸을 눕히고, 그 위에 장작 몇 단을 더 얹는 식이었다. 누군가 장작 맨 아래에 불을 붙였다. 시신은 계속 타들어가면서 흰색의 연기를 흩뜨렸다. 내부에 있는 수분이 증발하며 탁탁 소리를 냈다. 장작 일부가 무너졌다. 한쪽 다리를 가리고 있던 천이 흘러내려 까맣게 그을린 종아리가 드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더미와 시신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모든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굴곡진 긴 삶의 여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사후 좋은 세상으로 가겠다는 그 평생의 신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고통스런 환생 대신
바라왔던 더 좋은 세상으로 가게 될 거야.




 바라나시에 간 외지인은 누구나 한번씩은 앓게 된다는 말의 의미, 그리고 나도 그렇게 아팠던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것은 고산지대에 가면 고산병에 걸리고,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에 가면 밤낮이 바뀌는 곤란을 겪는 것처럼,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이 낯선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입장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다음날에도 갠지스 강변은 한결같은 흙빛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가득 차 있다. 힌두교의 여러 신을 상징하는 듯한 벽화와 낡은 상업 간판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정박해 있는 나룻배 옆에서 몇몇 남자들은 머리 위에 샴푸 거품을 잔뜩 얹은 채 목욕을 한다. 아이들은 물에 뛰어들어 서로 물을 먹이려고 장난 치기에 바쁘다. 또 누구는 옷가지를 들고 바닥으로 패대기를 치듯 빨래를 한다. 삶의 터전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리고 불이 꺼지지 않는 화장터까지. 모든 풍경은 다시 평온하게 제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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