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사 May 20. 2022

에니어그램 머리형은 허상을 사랑한다

머리에너지와 인간의 허상, 언어, 거리두기

모든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그중에서 무엇이 정답인지 모를 때에 느끼는 불안이 있다. 인간은 현실을 주어지는 대로 반사적으로만 반응하며 살지 않고, 삶과 세상을 생존 전략이 필요한 어떤 시공간으로 느낀다.


내가 무엇을 해왔고,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고등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와 같은 것을 인식하고 고민하는 정신적 활동은 머리에너지(사)에 속한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역동 중 본능적인 것(장), 정서적인 것(가슴)을 제외한 모든 것이 머리에너지다.


장, 가슴, 머리 영역은 서로 완벽히 분리할 수는 없으나 구분은 될 수 있는데, 문제를 풀기 위해 계산하는 것, 내일 할 일을 계획하는 것, 오늘 했어야 했던 것을 반추하는 것, 과거를 회상하는 것, 철학적인 주제를 고찰하는 것, 즐겁거나 자극적이나 위협적이거나 슬픈 일을 상상하는 것은 모두 머리에너지의 작용이다.


머리에너지의 작용은 현재에는 없는 것들을 가져와준다.

슬픈 일을 반추하며 울었는가?

슬픈 감정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슬픔을 줬던 그 일은 지나가버렸고 현재에는 없는 허상이다.

자극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쾌감을 느꼈는가?

역시 현재 실제로 겪고 있지 않은 허상이다.

그런데도 이 허상들은 우리에게 신체적,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머리에너지의 힘이다.


이 머리에너지로 우리는 대상과 접촉하지 않고도 그것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

스스로의 힘과 자원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전지전능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머리에너지는 때가 되면 나고 자라는 풀처럼 살 수 없어서 어디로 나아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본능의 자연스러움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멀어지게 하는 트릭이 된다.


머리에너지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자.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지만 개념화하지 않고 그저 그 느낌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가슴에너지다. 그저 머문다는 것은 그 느낌에 붙일 이름이나 설명이 떠오르지 않고 내가 그런 느낌을 느낀다는 것 또한 하나의 명제로서 인식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나 '기분이 좋다', '더욱 오래 함께 있고 싶다'라고 느낌이 구체화되면서 자신이 그런 느낌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머리에너지가 개입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실제 현실을 머리에너지로 파악하려는 작용 때문에 무언가를 납득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미지의 세계다. 더 정확히는 '납득이 필요 없음'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납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보면 그에 대한 상(像)을 갖는다. 사과를 보면 우리 내면에 사과에 대한 상이 맺힌다. 사과의 모양과 맛, '영양분 많은 과일'과 같은 사과가 가진 통상적인 기능, '인류에게서 악을 일깨운 이브의 사과'나 '뉴턴에게 깨달음을 준 매개체'와 같은 사회문화적인 의미,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온갖 의미들이 모두 그 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사과와 식탁에 놓인 실재하는 사과는 같은 것일까?

사과는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인데 우리 안의 사과는 맥락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는 어떤 이미지다.

실재하는 사과와 마음속의 사과는 사실은 같은 것이 아닌데도 우리에게는 서로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 안에 사과의 상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사과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인간 세계에는 대상이 존재하면 그 대상의 상()인간의 마음에 함께 존재하고, 인간은 그 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 만물과 함께 나고 자랐지만 그들과 그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하다. 상은 인간이 만물에 대해 갖는 거리감의 증거이다. 그리고 머리에너지는 이 상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이라고 인식하는 모든 것에는 이 머리에너지가 개입되어 있다.


머리에너지는 더 나아가 우리 마음에 맺힌 상을 그저 찰나의 이미지로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규정하여 하나의 정보로 기억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그 정보를 산출하여 목적에 맞게 사용하며 다른 정보와 연결해 또 다른 정보를 만들어 낸다. 머리에너지는 인간의 끝없는 지적 활동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렇게 머리에너지가 세상에서 가시적으로 관여할 동안 장과 가슴의 에너지는 저변에서 보이지 않게 세상을 움직인다. 장과 가슴에너지는 분명 존재하는 강력한 힘이지만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인간인 이상 장형, 가슴형, 머리형 모두 머리에너지에 의존하고 집착하고 있으며 에너지 그룹 간의 차이는 사실 굉장히 미미하지만, 그 미미한 차이가 우리의 일상에서는 크게 느껴진다.


머리형은 모든 유형 중에서 이 머리에너지에 가장 많이 의존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머리형의 머리에너지에 대한 탐식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없어서 그것을 가장 실체에 가깝게 알고자 하는 분별 욕구의 발로이며, 이는 분명함, 정확함, 체계에 대한 욕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욕구는 언어에 의해 개념화되 체계화된 표상을 통해 현실을 경험하려는 경향과 함께 한다.


머리에너지는 언어와 함께 그 파워가 증강된다. 모호한 이미지와 생각들의 더미는 언어로 표현되면서 훨씬 구체화되고 명료해진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전달되겠지만, 화자가 가진 그 밖의 모든 주관성과 생생한 현장성은 사라져 버린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와 화자가 느끼는 실제 심적 상태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실제 심적 상태와 그가 단어에 부여하고자 한 의미가 진정 어떤 것인지는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것이며, 무엇으로 가장 진실에 가깝게 짐작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행복감을 대리하고 '슬프다'라고 말하는 것이 슬픔을 대리한다.

행복과 슬픔이라는 단어에 대해 각자가 가진 상이 있고, 각자의 상에 걸맞게 상대를 이해했을 뿐이면서도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한. 이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머리형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언어란 자신의 머리에너지를 현실에 효과적으로 발산하는 통로이자 삶과 세상이라는 시공간을 효율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코드 같은 것이지만 머리에너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머리형이 단연 언어적 표현에 의존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머리에너지와 허상, 언어, 실재와의 거리두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너무 많은 머리에너지에 매몰되면 실제 경험을 회피하면서도 자신이 대상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자신의 상상이 가미된 시각을 현실로 느낀다거나, 나 자신과 타인에게서 나온 말과 글, 이론에 심취해 상황과 대상을 실제적 요소가 배제된 조감도처럼 바라보거나, 이심전심으로 흘려보낼 것들마저 명명백백히 해설을 하거나, 지나치게 초연해 자기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위로나 돌봄을 주지 못할 수 있다.


머리형은 너무 많은 머리에너지 때문에 평소에도 자기 자신을 생각이 복잡하거나 지적이라거나 분석적이라거나 공상과 몽상이 많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머리에너지에 매몰된다'는 개념은 자기 성찰을 하기 전까지는 잘 모를 수 있다. 가슴형이 연결 욕구와 자기이미지에 깊이 집착해있지만 그것을 매 순간 의식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머리형은 자신 안의 장과 가슴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해 자연스러움이 박탈되어 어디로 어떻게 가는가에 대한 불안이 많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에너지를 더욱 많이 쓰지만 그로 인해 더욱 복잡한 미로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다.

이전 02화 에니어그램 장형 가슴형 머리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