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

크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

by 연한보라

여름에 멘토와 같은 분과 식사를 했었을 때였다. 멘토님은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봤는데, 잠시 머리를 짚고 생각하다가, '일도 그렇고 덕질도 그렇고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나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진짜 변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그냥 불안하기만 하다'라고 했다. 인생의 한 장이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다고 하셔서, 그렇다면 지금이 그런 시간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지금 그런 과도기라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진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덕질도 끝나고, 일에 대한 열정이나 열의도 끝나고, 현실 인생에서 좋아하던 사람에 대한 마음도 끝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확실치는 않고 그냥 시들시들해진 거지, 그럼 시들함에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다 잡고 초심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아예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것도 명확지 않고 모르겠다. 모든 것에 대한 빠르고 명확한 답을 내리고 싶어 하는 성격인데, 최근에 상담을 하면서 '답이 없는 문제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담사님의 조언은 '어차피 나오지 않을 답, 조바심 낸다고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그 문제와 상황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적어도 덜 괴롭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업무는 쳐내면 되고, 하고 싶은 것은 실행하면 되는데 덕질이나 진로에 대해서는 조바심 낸다고 해결되지 않으므로 나는 그 문제들을 그냥 들고 쳐다보면서 일정 시간을 보냈다.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했지만, 단 시간 내에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롤 다독이면서 지냈다.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지금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는 중이구나" 하고. 여름이 지나가고 짧은 가을이 지나가듯이 나는 이제 그것들과 멀어지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름에 그게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이고, 쥐어잡으며 안 멀어질까 싶어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 마음을 놓고 거리가 생기고 보니 쥐어잡는다고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억지로 버텨서는 힘듦만 있는 것도 보인다.


그래서 지금은, 내 마음을 내려놓고 있다. 최애를 사랑했던 마음, 애틋했던 마음, 모든 것을 바꿔서라도 영원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좋아했던 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함께 하고 싶었던 욕심 같은 것을 내려놓고 있다. 이 직장에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좋았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아쉬움을, 안락하고 편안했던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다.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건,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가능해졌다. 안 되는 것들을 쥐고 잡고 억지로 끌어갈 힘이 부족해졌을 때 그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아직도, 그 페이지에 대한 절절한 미련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아름다웠던 기억들에 대한 그리움이 내 발목을 잡고, 행복했던 감정이 나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나는 넘어가고 있다.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마음은 이미 식었고, 상황도 이미 변하고 있다.


다음 페이지는 더 아름다울지 좋을지도 모르면서 그냥 가고 있다. 시간이 그렇게 해결해주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상담을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