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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Mar 11. 2022

어젯밤 인사를 나누던 그 사람, 오늘 범죄자가 된다면

범죄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기에

'아빠, 팬케이크 먹고 싶어요.'


어느 탄원서에 적힌 소원종이를 본다.

아이가 커가는 사진, 아버지의 부재를 슬퍼하는 모습이 뒤따른다.


어느 아내의 탄원서를 본다.

사랑하는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듣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흑과 백에 속하는 사람만 있는 것 같아서,

나쁜 자는 누구에게나 나쁜 자이고,

착한 이는 언제나 착할 것만 같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피고인이나 그 가족은, 흑도 백도 아님을 모르고.


오히려 피고인의 성격은 시종일관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게 애매하고,

그 가족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한 애정을 기반으로, 그들의 무고함을 진정으로 믿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가족이 범죄자가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 번의 실수이거나 돈을 벌기 위해 저지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혹시 검사의 기소가 잘못된 건 아닐까?

드라마처럼 피고인이 어떤 함정에 빠졌나?

이렇게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진실된 사랑을 받는 사람을 처벌한다는 의견을 써서 올리는 나야말로 악당은 아닐까?


그렇다.

역시 나의 편견이다.

세상 모두를 오만한 평면의 세계에 가두고,

착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가족에게 따뜻하지만, 나쁜 놈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가족에게도 놈팽이일 것이라 생각해온 탓이다.


편견은 피고인들의 구치소 면회에서 깨졌다.

그들의 대화는 교도관의 입회 아래 낱낱이 기록되는데,

어떤 나쁜 짓을 작당모의하나 싶어 들여다보면

오히려 씁쓸한 뒷맛만 따른다.

그 대화의 내용은 나의 상상과는 판이하기 때문이다.


나의 상상에 의하면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은폐할지,

혹은 어떤 변호사가 더 훌륭한 술책을 선보이는지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데(물론 그것에만 몰두하는 피고인도 있다. 그럴땐 차라리 잘됐다 싶다),


되려 남겨진 어머니가 건강검진은 다녀왔는지, 그 결과는 어땠는지,

구치소나 교도소까지 오는데 교통의 불편함은 없었는지,

영치금으로 많은 돈을 넣지 말라던지,

자신이 남겨두고 간 돈으로 예정했던 여행을 친구와 다녀오길 바란다던지,

자유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애인이 평소와 같이 출근을 하고, 즐겁게 살길 바란다며

행복하라는 당부가 오간다.


결국 이 묘한 감정의 근원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내 잘못된 인식에 뿌리를 둔다.

나는 헌법이 그 문언을 통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것은 알았어도,

현실에는 '범죄의 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몰랐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세계가 있고,

그들은 때로 그 의미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며,

그 댓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모른다.


나는 기록의 저편을 뛰어다니는 피고인들의 잔혹한 수법과 교묘한 도피행위,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하는 뻔뻔함 속에서 금새 피곤해지고, 때론 기계와도 같은 결과를 찍어내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실존의 인물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다.


물론 다른 생각도 든다.


그렇게 애절한 피고인들의 반성문이나 가족들의 탄원서에는 없는 것이 있다.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가 없다.


피고인들은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습니다.'는 말을 거듭 적어 제출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 죄송하다는 것일까?


누가 보아도 오타 하나 없이 정성들여 쓴 듯한 그 글에서,

이번 사건으로 피해받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나 사과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범죄의 순간 그렇게 행동한 자신은 어리석었고,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지금이 너무 괴로우며,

범죄 조회회보서에 기록을 남김으로써 미래를 망쳐버린 것에 대한 참회만 가득하다.

그럴땐 생각하게 된다.


피고인들의 사과는 결국 자신들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인생이나 가족의 소중함은 알아도,

스스로의 행위가 어느 소중한 인생, 어느 소중한 가정을 해쳤다는 사실은 모른다.

아니면 관심이 없거나.

형사처벌이 교화의 역할을 하긴 하나? 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어떤 범죄도 누구에게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누구에게도 쉽게 손가락질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들의 삶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기 전 눈을 감고 누웠을 때, 작게나마 소망하면 그 뿐이다.

오늘 만난 그 사람을, 내일 기록에서는 만나지 않게 해 주세요.


물론 이것은 나 자신도 포함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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