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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Mar 19. 2022

어느 강제추행 피해자에게 보내는 편지

방금 뱉은 그 말, 절대 바꾸지 말아요.

강제추행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주변에서 발생하는 성범죄를 지칭할 때, '성추행', '성희롱', 그리고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형법적으로 위 표현은 다르게 분류되는데, 성추행과 성희롱은 대게 '강제추행'으로, 성폭행의 경우 '강간'으로 의율된다.


또 이러한 강제추행과 강간은,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차이가 몹시 현저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성범죄라는 카테고리에 묶여있긴 하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결코 강제추행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강간의 고통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수준이 너무 지대할 뿐)


그렇다면 형사처벌을 '하는' 입장에서 위 각 죄는 어떻게 다를까?


강제추행죄와 강간죄는 그 처벌의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강제추행과 강간이라는 범죄가 가진 행위적 특성이 다른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강간의 경우 피해자를 폭행 또는 협박하여 항거불능 상태에 이르게 만든 다음, '성교'라는 과정을 거쳐야 성립하고, 그 행위의 특성으로 피해자의 몸에 DNA 등 물리적인 증거를 남기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 강제추행은 찰나의 순간 피해자의 몸을 만지면서 성립하는 범죄기 때문에 피해자의 몸에 물리적인 흔적이 남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한 번 만지든, 여러번 만지든  또는 폭행, 협박을 수반하여 만지든 피해자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 피해자는 강제추행을 당해도,

매 순간 저기 하늘 어딘가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하나님 아버지, 부처님, 알라신께서 CCTV 영상이라도 건네주시지 않는 다음에야,

자신이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입증하기 어렵다(물론 증거조사는 경찰이 하고 기소는 검사가 하지만 그들도 신은 아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위 장면이 녹화된 영상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그런 행운이 자주 찾아오지 않음은 우리 모두 이제는 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야 하나요?

피해자는 피고인이 만졌다고 하고, 피고인은 피해자를 안 만졌다고 하는데,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당한 행위로 영혼이 망가졌다고 하고, 피고인은 피해자와 좋은 호감을 가지고 만나는 관계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들에게 콩밥의 매운맛을 먹일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다.

피해자의 '말'.


흔히 범죄 수사드라마를 보면, 피해자를 강제추행하는 장면이 귀신같이 어떻게 녹화되고, 또 그걸 녹화한 사람을 기적처럼 찾아내며, 완벽한 권선징악으로 막힌 우리의 가슴에 사이다를 선사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엔 그런 것이 없다.

사이다는 스스로, 그러니까 피해자가 찾아야 한다.


여기서 사이다가 될 수 있는 것이라 함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서 비롯된 나의 '말'이다.


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으면 이런 의구심이 생길 것이다.

말이 뭐라고? '내가 피해자에요'라고 말하면 다 강제추행이 되나? 아니 우리나라 법 이상한거 아냐?

너무 아무나 범죄자 만드는 거 아니냐고?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강제추행을 당하더라도 모든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신고를 하여 용기를 낸 피해자조차 자신이 겪은 일이 주는 충격으로 인해 부정확한 기억을 쏟아내고,

피해자의 말 한번에, 수사기관이 '어우 그러셨어요? 힘드셨겠어요'하며 유죄판결을 주는 것도 아니며,

수 차례에 걸친 반복된 질문으로 얻어낸 답으로 검사의 기소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릇된 생각으로 강제추행 신고를 하는 경우, 담당 수사관의 반복적인 질문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앞뒤 다른 말을 쏟아내면 법원까지 오더라도 무죄로 그 결론이 귀결된다(당연함. 앞뒤 다른 말을 어떻게 믿겠음?)


오히려 유죄판결을 받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말'을 잘해야 되지?


그래서 나는 강제추행을 당하고 있을 혹은 강제추행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1. 강제추행 일기를 써라.

2. 주변 친구들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즉시 문자 혹은 카카오톡을 보내라.

3. 그 내용은 세살 아이에게 설명을 하는 수준의 자세함을 담아라.


즉, 수사기관의 반복적인 질문에, 스스로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모순된 말을 쏟아내면서 무너질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그 상황을 종이 등에 정확하고 자세하게 고정시켜 훗날 발생할 수 있는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선 중 후를 나누어서.

즉, '제가 뭘 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내 가슴을 막 만졌어요.', '그 사람이 지난여름부터 자꾸만 제 엉덩이를 만지고, 껴안으려고 했어요.'.


이런 식으로 진술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함. 못 믿음. 누가 믿겠음?


강제추행죄는 형법 제298조에 규정되어 폭행,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한 자를, 10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는 범죄다.


그런 형사처벌을 그냥 쉽게 '만졌어요~'라고 해서

'아 그래요? 나빴네요! 쟤 유죄예요~'

라고 할 리가 없다.


때문에 모든 상황이 녹화된 CCTV 영상을 찾아낼 수 없다면,

피해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남은 CCTV, 즉 그 경험을 살려 완벽한 묘사를 해두어야만 한다.


흔히 피해자들이 하는 실수 중 하나는, 강제추행이 누군가가 내 몸을 만지면 발생하는 범죄이기 때문에 '어디를 만졌고, 만진게 확실하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강제추행죄는 '사람의 성적 자유 내지 성적 자기 결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조항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당한 순간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가 모두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피해자는 반드시, 공소사실에 기재된 상황이 어쩌다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전중후로 나누어 진술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했듯 '저 사람이 내 가슴 만졌어요!'가 아닌,

'제가 몇월 몇일 몇시 어느 식당에서 회식이 있어 모이게 되었습니다.'

'회식이 무르익어가던 중 피고인이 "왼쪽 팔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제 오른팔을 잡고"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제 오른손 깍지를 끼면서" "왼쪽 팔을 약간 대각선으로 내리면서 가슴을 1~2초 정도 움켜잡았습니다".

'저는 놀라 왜 그러냐고 화를 내지 못했고, 같이 일하는 동료 사이라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집에 오니 너무 수치심이 들어서 잠이 오지 않았고,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고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2주 동안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친구 누구누구와 상담했고, 그 증거자료를 여기에 제출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강제추행이 있기 전에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피고인이 어느 손, 어느 부위를 어떤 방식으로(그냥 약하게 2-3초 잡기, 세게 움켜잡기, 쓱 터치하기 등) 만졌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마음은 어땠는지, 신고하기까지 시간이 이 정도로 소요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는지를


전 중 후로 나누어 설명하라는 것이다.


아니 피해도 당했는데, 대응도 제가 해야 되나요?

네, 그렇습니다.


아니 내 영혼은 망가져 대인기피증이 걸렸는데, 난 그 이야기를 굳이 떠올리며 복기하고, 그걸 자세히 기록까지 하며, 남에게 떠벌리기도 해야 하나요?

미안해요. 근데 진짜 그래요. 제발 그래 줘요. 콩밥 먹여야죠.


죄에 대한 가장 큰 복수는 용서라지만, 고소도 하고 용서도 해주면 안 되는지요?

용서... 는 그리고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왜 굳이 제일 큰 복수를 하는지...?

중박 정도로 해결합시다. 대박 복수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그래요. 그럼 잘 기록하고 잘 진술할게요. 그럼 됐죠?

아니요.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것,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강제추행 피해자들에게 바치는 나의 부탁,

'방금 한 진술을 절대 토씨 하나도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위에도 적었듯 강제추행죄의 경우 결정적인 주요 증거가 피해자의 진술이다 보니, 피해자의 진술로 유죄와 무죄라는 큰 강을 건너게 된다.

때문에 피해자가 진술한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하더라도, 수사기관마다 그 내용이 바뀔 경우 변호사는 그 부분을 특히 집중 공략하여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며, 피고인은 결백하다며 무죄를 주장한다.

'저 피해자가 해바라기 센터에서는 분명 이렇게 말했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잖아요. 이거 뻥입니다~', '저 사람 지금 거짓말이에요. 피고인과 피해자는 연인 사이입니다.', 피고인은 피해자와 사이좋은 군대 선후임으로, 피고인은 여성을 좋아하며 강제추행을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라고.


그러면 당황한 피해자는 무언가 더 확실히 설명하기 위해 살을 붙이고, 당황스러움과 충격이 섞인 상태에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사기관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다른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아니 많다).


그러면 큰일이 난다.

어떤 큰일이 나냐?

무죄 나옵니다.

그 사람, 웃으면서 밖으로 나와요.


물론 대법원은 강제추행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하더라도 주요 부분에 일관성이 있으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유죄판결을 내린다는 입장이지만,

그 주요 부분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건마다 너무나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최대한 모든 부분에서 일관된 진술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알고 있다.

추행은 한 순간 벼락같이 지나고, 내게 남은 잔상은 그저 충격뿐이며, 나는 너무 수치스러워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는 것을.


하지만 이 역시 말해주고 싶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만,

강제추행은 그냥 그 손으로 뺨을 맞는 일이다.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발생할 수 있는 교통사고 같은 일을 당했는데, 자동차 종합보험처럼 누군가 해결해주지도 않는 이 일을 손 놓고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게 뭐야? 특가 도주 치상(뺑소니)이지.


그러니 우리는 뺨을 맞았다며 눈을 감고 그 기억을 잊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

나의 보험은 나다.

나의 손을 잡고, 나의 기억에 기대 교통사고 처리를 하러 가면 된다.


그리고 반드시 생각할 것. 어떤 사고든, 그 처리는 원래 더디 걸리고, 나의 신경을 긁는다.

그러니 그 사고를 신속하게, 정확하게 처리하자.

그리고 떠나보내면 그뿐이다.

부디 내가 떠나보낸 그 자리에, 피고인은 남아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하기를.


이렇게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편한 방법을 담아, 이 편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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