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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Mar 29. 2022

차곡차곡 매일의 순간을 쌓아올리며

엄마, 저는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어요.

일주일의 시작은 새 맥북과 함께다.


예로부터 엄마는, 내게 물건을 사줄때마다 그것을 가지고 난 이후에 더 많은 애정을 쏟으라고 가르쳤다. 새로운 물건을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은 어느 것으로부터도 만족감을 못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무언가를 살 때 깊게 고심하지 말고, 그냥 산 후에 그걸 많이 쓰고 아끼면서 살아보라고.

그러면 그 물건이 나에게 큰 의미가 되고, 다른 새로운 것에도 지나친 욕망은 안 가지게 될 것이라면서.


응, 엄마.

내가 얘 많이 써볼게 지금부터.

애플놈들.

뜯을 때조차 이렇게 디테일하기 있어 없어?

물론 좋다는 소리다.

확실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15인치를 오랫동안 사용하다, 14인치로 갈아타려니 괜히 작은 것 같다는 마음은 지울 수가 없고,

심지어 이번 맥북에는 화면에 일명 탈모라고 불리는 노치도 적용되어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없기만 했다.


그런데?

너무 잘씀. 노치 의식도 안됨.

당연함. 너무 빠르고 스피커 헉소리나게 좋음.

네, 팀 쿡과 실리콘밸리의 아줌마 아즈씨들 훌륭한 칩 만들어줘서 감사요.

어느 날 b가 사준 휘낭시에.

카페에 앉아 휘낭시에를 먹으면서, 또 정겹게 수다를 떨었다.

아마 일 이야기와 그 일이 서툴 때면 짜증이 난다는 이야기와 각자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했겠지.


우리의 만남은 매일이 비슷하다.

언제 보아도 내 마음에 윤기가 차오르는 것도 똑같고.

회사를 마치고 갔던 '세미프로젝트'. 자주 가는 옷가게 사장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

유행하는 카페 인테리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아 가끔 찾곤 하는데, 이런 넓은 공간이 주는 쾌적감은 사람의 마음까지 여유롭게 만든다고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이 곳에 앉아 지난 여행들을 추억하면서, 사진들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난 이 날 왜 이곳에 있었는지, 거기서는 무엇을 했는지, 당시에는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까지도.


몇 년이 지난 순간들임에도 이렇게나 기억에 선명한 것을 보면,

어떤 순간들은 내 안에 영원히 남는 것이다.

물론 영원히 남는 순간에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지.

늦게까지 자다가 일정을 아예 바꿔버린 순간도 남고, 피곤하다며 포기한 경험을 향한 미련도 함께 남는다.


그렇게 수 많은 순간들의 기록을 곰곰히 쳐다보다가,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 끝내 포기하고 만 유럽여행기를 마무리지어야지 하고 마음먹게 됐다.

그렇게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해 지는 모습을 봤다.

날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고 하면,

그 문을 나서기 전까지 복잡했던 마음들은 우습게도 까먹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어느 날과 같이 점심을 먹고 가는 길, 갑자기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계신 부장님을 바라보니 한마디 하셨다.

'저기, 꽃 폈네요.'


보는 순간 우리 모두가 아마 탄성을 질렀지 싶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건물들 사이로, 조용하게 피어있던 목련나무를 보면서 저게 어떻게 저렇게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지? 하고 혼잣말을 하니 조용히 다른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저건 원래 있고, 건물들이 우겨들어온 거 아닐까요?


이 지구에 호모 사피엔스가 너무 많다는 누군가의 비판은 맞는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야근하지 않는 어느 날에는 집에 돌아와 애플티비로 파친코를 봤다.

이전에 애플티비 1주일 무료체험권을 사용하고는 홀랑 해지해버렸는데, 맥북을 새로 산다면 3개월 무료 이용권을 준다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봤다.


사실은 매우 기다린 작품이다.

서양의 자본으로 만드는 드라마가, 심지어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을 미화하지도 않으면서, 옛 한국의 정서와 모습을 거의 있는 그대로 고증하여 만든다고 하는데 무조건 봐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2번 봐서 더 잘되게 해주고 싶다.


미국에 있을 때에도 자주 들었다.

니하오, 곤니치와. 아이 러브 재팬~(어쩌라고?)

그리곤 한참 후에 그들은 말하곤 했다.

오 너 영어잘하는구나~ 그래 너 어디서 왔어? 내 말은 너 '진짜로' 어디서 왔냐고~

진짜가 어딨어? 그럼 너네는 뭐 영국 사람이야?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수정란으로부터 왔다.


오징어게임의 성공도 좋고, 방탄소년단의 성공도 반갑지만 이런 드라마의 성공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내 찾아온 p와의 나들이길.

주말에는 비 소식이 있다고 해서 잔뜩 긴장했었다.

비만 오면 늦게 일어나고 싶고, 괜히 씻기도 싫고 나가기도 귀찮으니까.


결국 머리를 자른다는 핑계를 대고 길을 나섰다.

내년 결혼식까지 머리를 인생 최초로 길러보려고 하는데, 자꾸 거울에 보이는 내가 장발남성 같아 보여서 내린 특단의 조치다.


5:5 가르마로 층 하나도 없이 머리만 기르면 갑자기 자신이 스네이프 교수처럼 보일 때가 있다.


결국 제발 머리에 에센스 좀 바르라는 잔소리만 한가득 안고 나서는 길.

드디어, 이 도시에도 봄의 전령이 왔다.

흐드러지게 만개하지만, 한 순간 절정을 피우고 속절없이 지는 벚꽃의 계절이다.

주변의 벚꽃들을 살피며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아! 주말 중 가장 좋은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때일 것이다.

갔더니 손님은 우리밖에 없고,

소나무 분재에 온 신경이 팔린 p의 취향도 십분 저격하면서 조용히 우드와 그린 톤으로 마무리된 인테리어의 카페에,

할아버지 댁에나 있었을 법한 스피커에서는 느린 리듬의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온 공간을 울려 우리 기분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난 여기에 앉아 p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우드, 메탈, 그린 또는 네이비로 인테리어를 하겠다면서 무슨 색 소파가 좋냐고 집착하는 모습을 재차 보여주었다.

사실 이제 p는 집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긴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망을 가질 때 그리고 미래 어떤 모습의 공간을 가지게 될지 상상할 수 있을 때가 가장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꿈은 계속 꾸어야 행복한 것이다.

아직 추운 나를 두고, p는 빙수를 시켜먹었다.

나는 아직 겨울에 있는데, p는 벌써 여름을 맞이하나보다.

어묵탕에 고등어 초밥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결국 간단히 '금주 by 카네바시라'에서 반주를 했다.

첫 번째에 갔을 때는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두 번째에 가니 특히 더 맛있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역시 누구와 어떤 기분으로 먹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곤 늘 그렇듯이 세상 사는 이야기하면서 낄낄거렸지.

술을 마신 이후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관찰했는데, 난 코로나가 다 종식된 세상에 와 있는 줄 알았다.

젊은이들은 얼마나 빠르고 날쌔고 북적한지.

걸어 다니는 내내 마스크를 올리고 또 올리기만 했다.

사람은 많고, 연기는 자욱해서 도망간 옷가게.

사실 만취한 상태로 이것저것 입어보겠다고 업되서 p가 내내 키득거렸던 기억만 남아있다.

저기서 썼던 모자 예뻤던 것 같은데...


하고 만화방으로 피신했네.

집에 가기 전, 만화방에서 보았던 책이 너무 재밌어 결국 돌아와 돈 주고 만화책을 샀다.

아줌마 잘울지?

느닷없이 우는 모습을 본 p의 놀림을 얼마나 받았던지.

그렇게 일요일이 밝았다.

피자가 먹고 싶다고 하여 나선 길,

피자에 맥주를 먹겠다면서 마음을 먹었는데

사실 속으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민이 가득했다.


내 인생에서 걱정과 아직 안 닥친 일에 대한 근심을 빼면 가용시간이 두 배는 되지 않을까 싶다.

왜 모든 것을 이렇게 항상 다 계획하고, 통제하고 싶을까?


그럴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반복한다.

옆에서 p는 이런 생각 안해야지 하고 부정적인 다짐을 하면, 오히려 그 생각이 더 많이 난다며 차라리 맛있는 것 먹고 다른 생각을 더 많이 하라고 한다.


다른 생각... 음... 내가 시킨 택배 언제 오지... 같은 거?

말해 무엇하나. 너무 맛있지 뭐.

루꼴라 랜치 피자는 처음 시켜봤는데 여태껏 먹은 것 중 제일 맛있었다.

앉아서 페퍼로니 어원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탐구함.


먹물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p는 참새와 방앗간처럼 들리는 lilisun에서 결국 스웻셔츠 하나에, 반팔 티셔츠, 트렌치코트를 샀다.

물론 저 중 티셔츠와 코트는 내거다. 깔깔깔깔


내가 안사안사병 걸린거지 p가 사주면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커피는 내가 샀다.

이 집 커피 정말 잘한다.

옆에서 p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집 중 하나라고 들떠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좋던지.

p를 역에 데려다주는 길, 괜히 더 춥고 날도 더 흐리고 그랬다.

사람의 기분에 따라, 날씨도 변하나?

버스를 타고 축 늘어져 있는데, p가 창 밖을 보라고 손을 흔들길래 봤더니

이런 장관이 늘어져 있었다.


어렸을 적 떠났던 유럽여행에서, 시옷이 하늘이 저런 색으로 보이는 것은 과학적으로 어떤 이유라고 막 설명했던 것을 웃으며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왠지 모르게 그 때를 떠올렸다.


세븐시스터즈 가려고 민박집아저씨 차타고 가던 그 때도 있었는데.

그 때의 나는 대학원 입학시험성적은 최악이지, 여행도 엄마 아빠 돈으로 왔지, 시옷은 뭐든지 똑똑하게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지 정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유레일패스를 산 값어치는 해 보겠다며 짧은 시간 내에 경주하듯 많은 나라를 오갔던 우리의 그 여행이 요즘에 와서는 자주 그립다.


그렇게 아무 기약도 없이, 아무런 계산도 없이 떠나는 여행 또 할 수 있을까?

어김 없이 돌아온 회사 출근일.

j가 사준 셔츠 입고 집을 나섰다.

그러곤 b와 y언니 모셔놓고 만두 샤브 먹고 커피마셨네.

역시 월요일 직급별 식사 나를 출근케 하고, 두꺼운 기록도 재차 골무 끼고 열심히 보게 한다.

마법이다.

월요일 저녁,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한 떨기 핀 목련 꽃 사진을 찍다 마침 도착한 mj를 만났다.

넷이서 보기로 한 저녁에 세 명 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너무 행복한 저녁이라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15분 일찍 왔는데, 나머지 두 명도 그만큼이나 일찍와 타이밍이 딱 좋게 맞은 것이 웃겼다.


역시는 역시다.

생전 처음으로 오마카세 음식 설명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시간.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정말 그 공간에 우리만 있는 것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내 친구가 잘됐는데, 내가 잘된 그런 기분인데 그걸 또 막 어디다가 크게 자랑은 못하는데 또 그걸 그냥 넘어가면 절대 안되고 그런...

그러니까


아주 행복했다. 정말로.

그렇게 mj에게 봄처럼 찾아온 기쁜 소식을 축하하면서 월 밤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떠남은 아쉽지만, 아쉬운 마음보다는 설렘이 훨씬 컸다.


어떤 기분 좋은 밤마다 찾아오는,

이야기는 해도 해도 마르지를 않고 고양감은 날로 커지는 그런 순간이었네.


역시, 엄마 저는 별일 없이 잘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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