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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Apr 05. 2022

꽃이 폈네요. 놀러 나가보겠습니다.

먼지 쌓인, 디지털카메라를 꺼낼 시간이 왔거든요.

얼음맥주 들이키면서 돌아보는 이번주.

어김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지냈다.

오랜만에 만난 sm언니는 시간이 빗겨나가기라도 한 듯이 대학시절의 여느때와 똑같았다.

나는 언니가 가지고 온 시간 속에서, 언니를 처음 보았던 스무 살의 나처럼 온갖 푸념을 늘어놓고 온갖 이야기를 풀어냈다.


스무살, 대학에 합격하고 난 후 상경하기 전 나는 서울에 집을 구해야만 했다.

친척들 집도 싫고, 기숙사에도 살기 싫었던 나는(그렇다. 나는 통금을 혐오했다.) 그럴거면 알아서 집을 구하라는 엄마에게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다며, 아무 준비도 안된 채로 우기기만 했었다.

그렇게 개강을 목전에 앞둔 즈음에, 서울에 올라가기는 무섭고 혼자 살기엔 두려움이 앞섰던 나는,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발견한 하숙집 룸메이트 모집글에 덜컥 쪽지를 보내 수락에 응해버렸다.

얼굴도 몰라, 성격도 몰라 심지어는 여자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과 그것도 한방을 나누어서 써야 한다는 현실이 다가오기도 전에, 나는 언니를 만났다.


신이 도우셨지.

까탈스럽지도 않아, 말만 하면 웃겨, 원하는 거라곤 문단속 잘하고 즐겁게 살면 된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고, 그녀가 자신의 직업을 찾고 내가 직업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아직도 친구로 지낸다.

신기하게도 내가 새로운 직업을 가질 때에는 또 다시 그녀가 있는 도시로 와 취직도 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내게 좋은 시작을 알리는 출발신호 같은 사람이다.

언니는 약속을 너무 많이 미루었다며 내게 비싼 밥을 사주겠다고 했었는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는 오히려 공짜밥에 신나 소화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많이 시켜먹었다.

언니 미안. 나 너무 잘먹지?

그러곤 길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돌아다니고, 여전히 길치인 서로를 비웃으면서 자라에서 쇼핑도 하고 그리고 여전히 사지는 않으며 보냈다.

카페에 들어가서는, 뭐 늘 똑같은 레파토리이긴 하지만 스무 살에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이야기, 당시 만났던 p와의 에피소드(그렇다. 그 때도 여전히 p는 나의 남자친구였다), 글솜씨가 좋았던 언니가 덕분에 받아온 햇반을 내가 홀라당 다 먹어버린 이야기 등을 하면서 그 때는 내가 얼마나 가진 것도 없이 행복했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 때에는 얼마나 가졌는지 타인과 비교하지도 않았고, 세면대가 없는 하숙집 화장실을 사용하면서도 불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랑하는 언니와 함께 방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았었다.


준결벽증 환자가 되어 자다가도 일어나 청소를 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과거의 내 모습이다.

그리고 이내 찾아온 도시의 봄.

지난주보다 한껏 만개한 벚꽃 길을 걸으니, 내가 보던 기록의 쿰쿰한 냄새까지 깨끗하게 씻겨지는 느낌이었다.

저마다 길을 걸으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데, 일행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아도 행복한 기분임을 느꼈다.


벚꽃은 예쁘지만 너무 빨리 진다고, 그게 너무 아쉽다고 말하는 내게 부장님은 빨리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셨다.

빨리 폈다 빨리 지는 대신, 완연하다고 할 수 있는 절정을 보여주는 벚꽃을 보며 삶의 황금기는 벚꽃만큼 빨리 오고, 소나무만큼 오래토록 내 곁에 머물렀으면 하고 소망했다.

이게 황금기지 뭐.

칼퇴 후 집에 누워 우드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며 행복해하는 일.

그리고 눈을 감아도 해가 떠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

그렇다. p가 어김없이, 이번 주에도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가 재택근무 후 빨리 오겠다고 한 말을 까맣게 잊고서는, 자느라 역에 데리러 가지도 못했다.

p는 그런 내게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해줬는데, 나는 그런 오늘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최근 들어서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보다 조용하고 어두운 장소에서 반주를 하며 저녁을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시끄러운 분위기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상대방과의 대화를 힘들게 하고, 그래서 힘겹게 비축해 둔 체력도 앗아가버리는 것 같다.


p도 오늘은 이런 곳에서 저녁을 먹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 말에 그보다 깊이 동감할 수가 없었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로 가늠하는 오늘의 날씨.

꽃구경하기 아주 좋겠다.

p는 부엌 선반 한 가운데에 놓여진 디지털카메라를 오늘은 기필코 들고 나가자며, 배터리 충전이 다 되어 있냐고 묻는다.

아니? 메모리도 없는데?

끝내 충전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나간 출사길.

눈치게임에 성공했는지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길거리에는 끝이 안보이는 곳까지 벚꽃이 드리워져 있고, 나는 사진으로 오늘 혼쭐을 내주겠다며 연신 뷰파인더만 들여다봤다.

그러다 들어간 골목길의 어느 카페에서, 바깥 구경을 했다.

밖에는 저렇게 흐드러지게 꽃이 펴 있는데, 카페 창문 사이로 비쳐 보이는 풍경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뭔가?

우연한 발견, 우연한 만남을 좋아하는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서 다분히 끝내주는 맛의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제대로 터졌지 꽃봉우리.

잘린 사진의 밑 부분은 사람과 자동차들이다.

p는 저 멀리 산을 바라보면서,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가장 아름다움과 멀다고 이야기했다.

조용히 아랫부분 잘라서 찍고 있던 나도 흠칫했다.


같은 생각 하는구나?

아 정말로 아름다웠다.

꽃이 아름다워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행복해보이지,

날은 따뜻하면서 시원하지,

오랜만에 디지털카메라를 드니 어딘가로 떠나온 것만 같아서 그랬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들떠 보여 온 세상이 들뜬 것만 같았고.

그런 나를 p는 또 열심히 담고, 나는 그런 p를 남겼다.

오늘이 근데 다 가버리고 나면 끙끙 앓을 것 같은 예감은 뭘까?

그렇게 발이 터지도록 온 세상의 들뜸을 함께 느끼고 나서야, 저녁을 먹겠다며 나섰다.

늘 지나치지만 선뜻 들어가보지 않게 되던 식당을 들어갈 용기도 그날은 생기질 뭐야.

결국 볶음면 먹고, 쌀국수 먹고 나왔다.

사실 너무 지쳐서 맨 처음 마신 펩시콜라가 제일 맛있게 느껴졌다.

밥 먹고 에그타르트 먹고, 음악 듣고 한옥 카페에서 덜덜 떨고

그러다 집 가는게 토요일 밤 아니겠어요?

그렇게 눈 감았다 뜨니 지나가버린 주말의 끝자락 오후.

우울한 마음으로 p를 역에 데려다주는 길.

말 없이 버스에 비친 풍경이 예뻐 사진에 담았다.

솔직히 일주일에 3일은 쉬어야 충전되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토요일 하루 놀고 일요일 지쳐 쉬고 나면 월요일이 온다는 사실은 인간의 원죄가 무엇인지 고심하게 만든다.

아니, 인간의 원죄가 아니네. 주말이 2일뿐이라는 사실은 직장인의 원죄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p를 보내고 돌아서는 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찍고 있길래 습관처럼 올려다본 하늘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이야.

사실 너무 헛헛해서 성질이 나려고 했는데, 하늘이 주는 선물을 받고 열심히 정신체력을 보충했다.


비록 버스를 타는 체력까지는 없었지만, 돌아가 오랫동안 옷장을 지킨 겨울코트를 수납함에 넣고, 니트와 목도리를 정리했다.

아...출근했어야 하는데 사실 못했다.

할 것이 산더미같았는데

후회는 일요일 저녁마다 방문을 두드린다.

각자의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월요일 점심.

잠시 집에 들려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햄버거를 배달해 먹었다.

감자튀김은 꼭 추가해서 먹어야 하지만, 제로콜라는 안 먹으면 큰일나는 것 누구나 다 알지 않나?

죄책감의 무게는 제로콜라로 금새 가벼워진다.

저녁근무 전 잠시 sy언니를 보러 나서는 길, 일상에서 갑자기 마주친 아름다운 순간을 담는 것이 좋다.

최근까지도 같은 시간에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늘 어두컴컴했던 것만 같은데, 아직도 해가 곁에 있다니.

그렇게 sy언니가 사주는 케이크와 스콘에 커피까지 곁들여 먹으면서 저녁을 보냈다.

내가 한 위로와 응원이 부디 와 닿았길 바라면서.

네, 야근으로 일주일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다음주는 좀만 덜 게으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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