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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Apr 15. 2022

'부자'가 스펙이 되는 시대, 사기의 구렁텅이

거대한 과시는 거대한 결핍

"누가 한달에 돈을 얼마 번다며?

그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런 성공을 했대~

와 부럽다! 나도 그렇게 돈 많이 벌고 싶은데...

근데 저 사람 타고 다니는 차, 저거 뭐야? 저거 외제차 아니야? 너무 부러워. 어떻게 저렇게 돈이 많지? 원래 금수저인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가 화제다.

애나 델비라는 이름의 여성이, 거대 재벌 상속녀 행세를 하며 아무 담보 없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며, 제재 없이 개인 전용기를 타고, 묵고 있던 호텔에 숙박료를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애나 델비는 결국 호텔 점심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부터 시작하여 사기죄로 기소되었고, 4년 복역 후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애나에게 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4억 원의 돈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일까?

거대 재벌 상속녀라는 타이틀이 아무리 달콤해도 이런 사기가 21세기에 정말로 통한단 말이야?


통했나보다.

얼마나 잘 통했으면, 사기를 쳤다는 저 행위 자체로도 4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 사회도 결코 미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타인이 돈을 잘 벌거나 혹은 돈이 많으면 이를 부러워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면, 이제는 돈이 많다는 사실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호감'이 되는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

부자인 것도 하나의 스펙이 되는 셈이다.

금수저 모델, 금수저 인플루언서, 금수저 연예인은 쉽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를 줄까?

나는 사람들이 사기 피해에 노출되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가 돈이 많다는 것을 선망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그 사실 자체를 어필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이러한 문화 아래에서 누군가는 쉽사리 차용사기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와, 형님 차 정말 좋아 보이네요~ 이 건물도 형님 거라면서요?'

'어 그래 뭐 별거 없다. 야 너 요즘 어려우면 내 건물 관리 좀 할래?'

'아 좋죠 형님. 근데 뭐 해야됩니까?'

'야 근데 내가 다른데에도 건물을 하나 더 사버려서 돈이 지금 급하게 막혀 있는데, 너 돈 얼마나 있어? 그거 빌려주면 내가 이 건물 지분 줄게. 앞으로 관리도 하게 해주고.'


이런 식으로 소리 없이 천천히, 내 세계를 잠식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형법 제347조에 규정된 사기죄는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을 편취하거나 재산상의 불법한 이익을 취득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취득하게 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로, 위와 같은 차용사기는 사기죄의 대표 유형 중 하나다.


돈을 빌리는 사람의 변제자력이나 의사를 면밀히 검토하지는 않았다. 근데 돈이 많아 보이기는 한다. 그리고 돈이 급하다고 한다. 나는 저 사람의 호감을 사고 싶다. 내 앞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부가수익도 기대가 된다. 돈을 빌려준다. 받지 못한다.

는 메커니즘으로 진행되는 사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사건을 경험하다 보면,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돈을 빌려 부자행세를 하는 사기꾼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만날 수 있고, 그들은 캐피탈과 같은 제2, 3금융권을 이용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앞에서 받은 대출을 메꾸기 위해 또 다른 대출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십중팔구 신용등급의 하락으로 이어지고, 피해자들의 추가대출은 더욱 어려워지며, 높아진 이자를 부담하느라 더욱 큰 빚의 구렁텅이로 낙하한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형사처벌을 받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해결이 될까? 아니 애초에 그들에게 제대로 된 형사처벌을 할 수나 있을까?


법원은 차용사기에서 사기꾼이 돈을 갚을 능력과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검사가 입증하면 유죄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은 감형을 노리기 때문에, 피해자와의 합의에 나아가 때때로 피해금을 보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사기죄는 사기를 칠 당시를 기준으로 사기꾼이 피해자를 속였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대법원은 만약 피해자가 사기꾼이 개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면 사기꾼에게 '편취의 범의가 없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경우 사기꾼에 대한 민사상 채무불이행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형사처벌을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위와 같은 경우 민사소송으로 채무불이행 책임을 묻는다고 하더라도, 사기꾼이 거지라며 한 푼도 줄 돈이 없다고 하면, 승소를 하더라도 집행이 불가하여 피해금을 변제받을 방법이 없다.

끔찍한 경우다.


악은 성실하다는 말이 있다.

악인들은 타인을 제대로 속이기 위해 누구보다 근면성실한 준비를 하고, 플랜 b, 플랜 c까지도 미리 계획해 우리의 세계를 어지럽힌다.

우리는 그들에게 평화를 위협받으면서도, 그들이 우리 세계에 찾아온 악인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어떤 방어책을 세울 수 있을까?

부자처럼 보이는 그들이 뻗는 마수를, 무슨 수로 떨쳐내야 할까?


우리도 성실해지는 것이다.

외제차를 타며 명품만 입고, 얼마나 돈이 많은지 자랑하는 그들에게, 이런 의심을 품어야 한다.

돈이 없으니 돈을 자랑한다.

그리고 나는 은행이 아닌 이상 그 어떤 누구에게도 돈을 빌려줄 마음이 없다.


오늘도 생각한다.

축적된 부의 과시는 스펙이 아니다.

과시는 곧 결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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