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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Dec 04. 2022

일이 많아 힘들 때에는,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 좋다

마음의 둑을 허물것 같이 몰려오는 일들을 가득 끌어안고

오늘도, 채 완성하지 못한 결과물을 들여다본다.

역시나다.

내 머릿속에서 나와 내가 쓴 말이지만,

스스로도 해낸 결과물 앞에서 뒷맛만 쓰다는 생각을 한다.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 괜히 엉덩이만 붙이고 있었다.


생각한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까?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 이 쳇바퀴는 언제 그만 돌릴 수 있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보노라면, 회의감의 맛은 더욱 써진다.

행복해들 보이네, 즐거워들 보이네.

심지어 일조차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네.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인간이 요즘은 기피의 대상이라던데, 나 같은 사람은 설 자리가 없겠구나.


스스로에 대한 타박을 시작한다.

난 못한 사람이다, 못난 사람이다, 부족한 사람이다.

더 이상은 그런 부정적인 마음에 빠져있을 수 없다며,

원두를 사러 나섰다.

원두가 정말이지 한 알도 남지 않았다.

내 마음의 여유가 바닥난 것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집과 회사만을 반복하는 삶을 살다가, 오랜만에 찬 바람을 들이마쉬며 큰 길을 건넌다.

알고 있는지?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에는 횡단보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몇 초만 더 기다기면 분명 초록불로 변할 텐데도, 그러면 그걸 힘차게 건너면 될 텐데도.

쉽사리 건너지지가 않고, 건너가는 것이 괜히 무섭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면서, 앞으로 나간다.

목적지는, 부러 집에서 아주 먼 커피집으로 정했다.

그래야 더욱 많이 걸을 수 있으니까.


원두를 사고 돌아오는 길, 음악을 들으며 걸으니 금세 기분의 파동이 잦아든다.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찼던 마음을, 어느새 내 머리 위로 노랗게 내린 가을이 달래주고 있다.

그렇구나, 이렇게나 가을이구나 아직도.

내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이에도, 그 짧다는 가을이 아직 채 다 가버리지는 않았구나.

음악을 들으며 부러 낙엽을 밟으며 걸어다닌다.

돌아오는 길, 집을 한참 지나서까지 걷고 또 걸었다.

길거리를 수놓은 은행잎만큼이나, 삶에 큰 위안이 되는 b와도 시간을 보냈다.

b는 복권을 긁어 10,000원이 당첨됐다고 한다.

나는 10,000원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기뻐보이는 b가 귀여워서 커피를 사달라고 졸랐다.

땡깡을 부리는 나를, b는 거절하는 법이 없다.

당첨된 복권을 현금으로 바꿔 커피를 사주고, 어느 날에는 찬 바람의 감성을 느끼자며 나와 회사 앞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었다.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것들을 다 사주겠다며 제안하는 b에게 고마워하기는 커녕, 초코쿠키까지 사달라 했다.

b는 양아치라면서도, 다 사준다고 하지 뭐.

덕분에, 그 시간들을 잘 접어 하늘에 띄워 보냈다.

주말엔 p를 만났다.

여느 때와 같다.


가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얼른 자전거를 타러 한강에 가야 한다며,

루틴처럼 자리잡은 한강에서 자전거타기를 하러 가놓고서는, 왠걸 자전거도 타지 않고 내내 걸어다니기만 했다.


다 저 버들나무 때문에.

한강에 온 것만 벌써 몇 번인데, 몰랐다.

아니 봤어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나.

물을 좋아하는 우리답게 물 주위를 돌아다니는게 정석인데, 왜인지 햇볕이 드는 버들나무 가지들 사이를 걸어다니고만 싶었다.


정말, 정말 너무나 좋았다.

좋다는 말이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얕은가 싶을 만큼.

가지에 당도한 햇볕 사이에 김밥을 먹으며 앉아 있던 사람도 하나의 풍경같고,

길게 늘어져 언덕을 수놓은 그림자는 왠지 모를 고양감을 준다.

부러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끊임없이 바람이 만드는 버들나무 소리를 들어보라고, p에게 호들갑을 떨던 순간을, 좋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강가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걸어다니니, p는 회사 근처 공원을 소개하고 싶다고 한다.

매번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목적지를 정하지만, 사실은 회사 앞 공원도 참 볼만하다고, 점심을 먹고 회사 사람들이랑 그 곳을 산책하곤 한다며 그 곳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일 때, 이유 없이 어느 순간마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나도 매한가지이므로, 그를 따라 나서기로 한다.

그 곳에 앉아 니가 바라보는 풍경이 뭔지 나도 알고 싶으니까.


솔직히 놀랐다. 저렇게 반짝거리고 예쁠지 몰랐다.

술술 걸어 돌아나오려던 마음을 접고, 정자가 보이는 곳 벤치에 앉는다.

너도 말이 없다.

그렇게 30분은 앉아있었네.

사실 매일 여의도로 출근하는 p가 오늘 이 곳으로 이끈 이유는, 여의도의 한 백화점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을 꼽으라면 언제나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당일이 기다려져서라기보다는, 크리스마스까지 오는 그 동안이 좋다.

거리의 캐롤을 들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재즈를 틀어둔다.

겨울이 가져오는 찬 공기가 창문가에 오도독 맺히는 순간이 좋고, 긴 발목양말을 신고서는 귤을 까먹는 그 때만의 분위기가 좋다.

하지만 기껏 방문한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 있고,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기쁘지도 않다.

기대가 커서라고, 생각한다.

완벽할 것 같은 순간을 상상하고 기대에 차 방문한 곳에서는 늘 그만큼의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예상하지 않아야 오히려 좋다.

예상하지 않아, 좋은 곳은 여기였구나.

p와 그것도 당일에, 기대 없이 예약한 초밥 코스요리가 정말 맜있었던 것은 이 날 최고의 기쁨이었지 싶다.

쉐프님은 말이 없었지만, 요리는 끝내주게 하나하나 맛있고, 우리의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않지만 무언가 필요하다고 혼잣말로 이야기할 때마다 귀신같이 그걸 찾아다 주셨다.

심지어는 도마 옆에 쓰인 한자를 궁금해하는 눈치까지 채신 모양이다.

오늘 하루가 덕분에 더욱 빛난다.

물론 오늘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이번에도 역시, 너무 많이 먹었다며 먼 지하철 역까지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자는 p의 존재다.

p에게서는 늘 따뜻한 냄새가 난다.

실제로도, 그의 성품에서도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일요일에는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만나면 알게되는,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할지를 알려주는 그런 존재들이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음에도 킥킥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말하면서도 즐겁고, 들으면서도 즐겁다.

함께하는 동안,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존재가 아니란 뜻이겠지.

친구들은 내가 말이 너무 많다며 웃는다.

가을의 존재를 느끼다 못해, 너무 아름다워 걸음걸음마다 순간을 남기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는 날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리고, 사진을 찍는 나를 찍고 있다.

우습지만 그래도, 안 찍을수가 없다.

y가 원했던 즉석사진도 남겼다.

찍자고 해놓곤, 오늘은 아니라던 그녀를 이끌고 굳이 찾아간 이태원에서, 결과물이 웃겨서 오히려 추억이 된 사진을 주머니에 넣는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이렇게 커피에 메론소다도 한잔 더 마셨고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은 역시, p를 만나 서울역에 내린다.

p는 나를 데리러 오고, 내 짐을 들어주고, 나의 떠남을 진심으로 슬퍼해준다. 여느 때와 같다.

그런 그의 옆에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래를 기약하며 ‘우리 집 어디에 구할까? 방은 몇 개였으면 좋겠어?’ 정도의 질문을 하는 것이 전부다.

각기 다른 도시에 산지 꽤 된 지금도, 이별에 익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리 도착해 있던 하행선 기차에 올라타면, 갑자기 불이 꺼지는 순간이 있다.

불만 꺼진 것인데도 일순간 사방이 고요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 순간이 그렇게나 좋다.

떠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면서도, 창문 밖 너머 사람들은 다 어디로 떠나는 것인지, 떠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 평일의 일상에, 몇년만에 보는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친구 sm이 찾아왔다.

대학교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시절부터 알았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벌써 어른이 되어 그 먼 타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놓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녀를 낳은 것도, 키운 것도 아니지만 괜히 내가 자랑스러워 혼자 온갖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더 이야기해줘, 어떻게 사는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더 말해줘, 하고 졸랐더랬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 얼마나 고단하지 않던지.

지난한 평일이 지나고, 다시, p가 내려왔다.

이번에도 꽃다발과 함께다.

서울역으로 가는 길, 봐둔 꽃집이 있다며 사주는 본인이 더 기뻐한다.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는 내게는 더 없는 기쁨이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일들을 생각하면서도,

들른 곳은 다시 활자들이 가득한 중고서점이다.

화가 김환기와 그의 부인인 변동림에 대한 글을 읽었다.

가볍에 들른 카페에 앉아, 가벼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다 끝내는 p가 밥은 언제쯤 먹으러 가냐 물을 때까지, 아니 결국은 그 한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덮을 때까지 자리에 앉아 책에 열중했다.


그림이라는 것이 뭔지, 꿈과 이상이라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 기뻤다.

아픈 치아가 흔들려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을 때까지 그림에만 몰두했던 사람의 이름은 이렇게나 드높고, 모든 것이 너무나 버겁다는 생각만 하는 내가 얼마나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끝내, 모든 일에 물음표를 붙이고 만다.

누가 시켜서 이 일을 선택했는가?

누가 주말에도 당연히 나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가?

누가 주말에 할 것이라 생각하며 평일에 게으름을 피웠는가?


그렇다.

마음에 등불을 다시금 켠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적극적으로 이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고 끝내 성취한 것이라 여겼다.


마음의 둑을 허물것 같이 몰려오는 일들을 가득 끌어안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선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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