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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Jan 03. 2023

꿈꾸던 서른 살이었던가?

정든 12월을, 익숙했던 2022년을 보내며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회식이 있었다.

이런 날 다 같이 모여 소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셔야 하냐는 의문은 피어날 여지도 없었다.

땅바닥에 고인 빗물 사이로 녹아든 은행잎을 바라보며 택시를 잡아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과는 거나하게 취해 의식을 저 세상에 보내버린 후, 돌아와 숙취에 고생한 게 전부다.

연말이 주는 고양감이란 정말이지 대단하다. 무언가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연예인처럼 연말마다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기분이 붕 떴다가 바닥에 곤두박이치길 반복했다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이 찾아온다.

과거에는 방학이 있었다. 여름에는 여름방학, 겨울에는 겨울방학 그리고 봄에는 봄방학이 말이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이때 즈음이면 보통 대학생들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이 있는 삶을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듯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고양감도 이해는 간다. 동물들이 동면을 가지는 것처럼, 나라는 인간도 연말에는 침대에 누워 최소 12시까지는 낮잠을 잘 수밖에 없도록 진화해온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이러한 기분과는 별개로, 일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월급쟁이에게 어제란 일이 있는 날이고, 오늘도 일이 있는 날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p에게 집 찬장에 있던 빠다코코낫을 몰래 먹은 게 아니냐며 역정을 내거나 빠다코코낫을 사들고 회사에 오는 것뿐이다.

12월도 되었으니 미뤄둔 숙제를 적어도 한 개쯤은 마무리지어야만 했다.

그런 기분으로 거실등을 드디어, 샀다.

얼마나 많은 후보가 머릿속을 떠다녔던가. 오죽하면 인스타그램 광고가 한동안 조명광고로 도배되기까지 했다.

물론 블랙프라이데이라는 핑계가 등에 업혀 있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샀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일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연말이라는 핑계를 대며, 과거의 인연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뜻밖에 찾아온 재밌는 시간에 알딸딸하면서도 행복하게 귀가하기도 했다.

과거 상사셨던 분의 초대를 받아 간 선술집에서는, 그동안 먹어보고 싶었던 메뉴를 폭탄과도 같이 시켜보기도 했고, 직장동료들과는 회사가 아닌 특별한 공간에서 회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내 삶에 한 꼭지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이야기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내 고민보다는 그들의 고민에 듣고 공감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느 날 아침은 유독 세상이 환했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에 하얗게 빛나고 있어, p를 깨워 눈곱도 떼지 않은 채로 아침 산책도 다녀왔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 눈이란, 낭만을 느끼게 만드는 기름이고, 밟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낭만이다.

물론 갑자기 우리가 포르투갈을 꺾고 16강에 가는 것만큼 낭만적인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친구들이 별로 없는 이 도시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에 장점이 있다면, 가끔 친구들이 내려왔을 때 맛집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것이고, 엄마와 아빠가 가까운 곳에 살아 당일치기로 도깨비처럼 본가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전시준비로 거의 처음 이 도시를 찾았다는 sh를, 평소 좋아하던 선술집에 데려갔었다.

대학원 졸업시험 직후 방문한 파리에서 만나고 처음이다. 3년 만이라니. 어제 본 것만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단 말이야 하면서 밀린 이야기를 숙제처럼 나눠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그녀의 빛나는 모습을 잘 바라보면 된다는 것,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에겐 영감이 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된다는 것.

물론 갑자기 찾아가 밥만 날름 얻어먹고 돌아오는 딸내미를, 점이 될 때까지 플랫폼에서 배웅해주는 부모님의 존재가 인생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는 않았다.

미뤄둔 만남은 또 있다.

마지막 만남이 언제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 중 하나인 s를 만났다.

s는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하고, 블로그에 오늘을 기록하게 만들어준 친구다. 꾸준한 매일의 기록이 삶에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를 알려준 친구이고, 나아가 언제 만나 내가 어떻게 변해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는 인간이다.

떠나온 지 오래된 서울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마음에 고심하다 고른 식당을, 그녀는 마음에 들어 했다.

안주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고, 입김을 불며 옛날호떡을 먹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며 알았다.

만남을 통한 행복은, 헤어지고 나서야 안다는 것을 말이다.

걸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밤, 가는 내내 그 만남이 참으로 좋았다고 생각을 한다.

누군가 내게 한국의 사계절 중 언제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겨울, 주저 않고 겨울이라고.

이렇게 덧붙이겠지.

보풀이 낀 빈티지 피셔맨 와플 니트를 입고, 티팟에 차를 가득 담아 마시고, 붕어빵에 어묵 국물을 곁들여 먹을 수 있으며, 석유난로 곁에서 추위를 녹인 후 밖으로 나오면, 추위가 껍질처럼 낀 성당 주변을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드디어, 이 도시에도, 눈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전전날에 p를 만나면 안 좋은 것이 있다. 둘이 있기만 하면 배가 고파 끊임없이 먹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한다.

먹고 먹다 와인까지 마시고 침대에 누우니, 몸이 참지 못하고 체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있는데, 내일이면 초밥 맞춤차림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큰일 났다. 아프면 안 된다며 걱정에 휩싸인 나를 데리고, p는 동네산책이라도 하자며 밖으로 나왔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전부다.

이렇게 체한 데에는 쌓여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그네를 타고, 청계천 주변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맞으라는 하늘의 계시였나 보다.

감상에 젖어있는데 p는 황당한 소리를 한다.

‘물고기는 다 어디 갔을까?’, ‘물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리 와봐 같이 같이 물고기 보자.’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  

다행히 초밥맞춤차림을 먹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그저 추위가 제약이라면 제약일 뿐, 괜스레 일본인 요리사가 만들어주는 초밥이라 더 맛있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학원 시절, 경험에 의해 쌓은 공포로 성게알과 연어알은 먹지 못한다.

비싼 식당은 우리와 맞지 않는 것일까?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이 밝자마자 광장시장으로 달려가 보리밥을 먹으니, 묵은 쳇기도 내려가는 것만 같다.

보리밥 파는 상인들도 성탄을 보내는지 평소 같다면 장사진일 광장시장에는 터줏대감 같은 상인들이 별로 없다.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p가 끝끝내 찾아준 보리밥 가게, 맛있다는 말로 부족해서 춤까지 췄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저녁에는 방구좀 뀌는 식당으로 가야 한다며 찾은 양식당은, 앞서 들어간 중년 부부의 착장이 너무 고급스러워 배로 기대가 됐다.

그 유명한 송로버섯에 희한한 맛이 나는 당근까지 먹고 나니, 이제 정말로 돈을 버는 어른이 된 것만 같고 그랬다.

이틀 연속 우리가 밥 먹는다고 얼마를 쓴 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너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은 맞다. 다 잘된 것이다.

이 겨울이 가는 속도보다, 한 해가 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

새해 첫날, 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이 마취총을 맞은 것처럼,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도, 그보다 빨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날 거라는 사실도 잊고 산다.

그 망각은 감사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미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게 만들어주지만, 못될 정도로 우리 모두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미루게끔 만든다.

할머니의 눈동자 속, 당연할 만큼 들어있던 총기가 언뜻 사라지는 순간이나, 와중에도 자신과 나의 나이차가 딱 60년이라며 p에게 알려주던 순간에 보이는 해사한 눈동자는 망각이 내 삶에 선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꿈꾸던 서른 살이었던가?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먹고살기 시작했으니 그런 것도 같겠으나, 눈 감으면 해일처럼 밀려드는 창피한 순간들은 매 순간 나로 하여금 얼마나 인간으로서 갈 길이 남았는지 반성하게 만든다.

도처에 널린 선택의 순간들은 불면의 밤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그 선택이 준 행복들은 그다음을 선택할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다.

새삼 매일은 선택이고, 그 선택이 쌓아 올린 오늘이 그에 대한 답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모든 것은 다 좋았던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내가 만들어낸 선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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