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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Feb 27. 2022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살아남는 방법

※주의※

이 글에는 매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최소)6번은 건너며 죽음의 위기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한 인간의 수기가 담겨 있습니다.

혹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아무런 멈춤 없이 쌩쌩 달리는 운전자가 읽을 경우,

불편함이나 모욕감을 느끼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니 왜?


왜...자꾸 지나가버리는 거지?

아니 언제 건너냐고...

집에 가고 싶다고요...


저기요...

여기...횡단보도에요...

똑똑똑? 운전자 분들~ 여기 사람 있어요...저...보행자에요^^


하 진짜 멈추라고 제발... 이 푸아라더랴아닠.아랴댜ㅓ루누샤바야로ㅓ댜ㅗ소 같은 놈들아!!!


그렇다.

이것은 매일 출근하기 위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한 인간의 기록이자,

그 때마다 나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운전자들을 향한 내 저주를 담은 26192번째 경고장이다.


이 저주는 로스쿨 형사소송법 시간, 한 교수님의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미래 운전자 여러분~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들은 무엇일까요?”

‘빨간불’. 그들은 걸어다니는 빨간불입니다. 빨간불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죠~ 멈춰야지요~. 참 쉽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라고 해서, 횡단보도를 무시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운전자들은 ‘원래’ 그런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자가 있을 경우 ‘우선’ 멈춰야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 속았다 속았어.

여태껏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지날 때 누가 멈춰주기라도 하면,

그 호의에 감읍하여 김첨지마냥 고개를 숙이며 묵념하곤 했었는데...

아 이거 참나 동방예의지국의 착한 딸래미가 아닌가 자아도취에 빠지곤 했었는데 이게 뭐야?


내가...먼저였잖아?

심지어 법도 있네?


그렇다. 도로교통법 제27조 제 1항에 의하면 모든 차의 운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에는 보행자의 횡단을 방해하거나 위험을 주지 아니하도록 그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하여야 한다.


근데 안 멈춘다.

안 멈춰요 교수님.

여기 다시 한 번 오셔서 확성기로 말씀 한 번 해주시겠어요?

혹시 이 횡단보도는 벌거벗은 횡단보도가 아닐까요?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나 봐요^^


심지어 대법원은,

대법원 2020. 12. 24. 선고 2020도8675 판결에서

'모든 차의 운전자는 보행자보다 먼저 횡단보행자용 신호기가 설치되지 않은 횡단보도에 진입한 경우에도, 보행자의 횡단을 방해하지 않거나 통행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상황이 아니고서는,

차를 일시정지하는 등으로 보행자의 통행이 방해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하여

횡단보도에 자동차가 먼저 진입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보행자가 지나가는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해야 한다'고까지 강조하기도 하였고,

올해 10월 20일부터는 도로교통법 제27조 제7항을 통해 어린이보호구역 내에서는 어린이의 존재 여부와 관계 없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의무적으로 일시정지하는 법이 시행될 예정이기도 하다.


거기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제3조 제2항 본문은,

자동차의 운전자가 자동차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을 경우 과실+교통사고+사람 다침 or 재물손괴의 콜라보가 탄생하였을 때

운전자의 죄에 공소기각이라는 주문을 내려주어 그 놀람을 씻게 해주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교통사고라도 났다 하면

제3조 제2항 단서 제6호를 통해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보호의무를 위반한 경우'로 그 예외에 해당된다고 하여

그 놀람을 씻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그렇다. 그들은 처벌받을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도 2020년 기준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약 4만건에 달한다.


그렇지만 법이 아무리 존재한들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그 법의 힘은 약한 것이고,

법 운운하다가 내 한 몸 지키지 못하는 참사는 막아야 하기에


나는 오늘도 온 우주의 조심성을 한데 모아 길을 건넌다.

힘들 땐 자동차운전자와 찐한 눈맞춤을 하며 내 존재를 알리기도 한다.

물론 마음으로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죽지 않기를 바라고,

월급 한 번 타보겠다고 10년을 공부했는데 느닷없이 비명횡사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절의 기준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으나 31살이면 요절로 볼 수 있지 않겠냐는 두려움을 마음에 새긴 채...

그리고 가끔은 한 5번 째 나를 못본 척 지나가는 자동차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아즈씨!!! 여기 횡단보도에요! 내가 빨간불이에요!! 내가!!! 지나가겠다잖아여!!!


역시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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