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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율 Jan 02. 2024

뜬금없는 TV 예찬

미디어를 '함께' 보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

"그거 알아? 옛날엔 TV 한 채널을 가족이 동시에 같이 봤었대!"

"대박!! 개취는 무시하고?! 윽.. 싫었겠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이런 얘기를 하며 TV 공중파가 《응답하라 2000》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어린 날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던 배구 방송. 방송의 시작을 알리는 애국가를 잠자코 보고 있다 보면 엄마가 퇴근해 집에 오셨습니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새천년 건강체조'를 시험 보느라 체조 방송을 챙겨보며 얼마나 열심히 따라 했는지요. EBS 교육방송은 사교육 없이 자라던 제게는 유일한 가정교사였고요. 뭐든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놓치면 다시 보기 어려웠죠. 운 좋게 재방송을 하면 모르지만요.


우리 집은 밥을 먹을 때 항상 TV를 함께 봤어요. 가족 대화를 위해서는 별로 좋지 않은 문화로 여겨지긴 하지만요. 뉴스나 드라마가 주였지만 콘텐츠가 굉장히 다양했어요. 지금처럼 내가 관심 있는 것만 보지 않고 틀어서 돌리다가 나오는 걸 봤죠.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세상을 알 수 있었어요. 인생은 드라마에서 다 배웠다고 봐야죠. 특히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연애나 사랑 같은 것들은요.


늘 TV를 틀어놓는 우리 집의 문화가 가족 간의 대화를 부족하게 했고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했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그래서 TV가 정말 싫었어요. 함께 책 읽는 가족 문화가 참 부러웠죠. 부모님과는 달리 나는 함께 책 읽는 집안 분위기를 만들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놀고 있는 TV와 더 바빠진 각자의 스마트폰 그뿐인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늘 혼자 폰을 보며 웃고 있는 반려인을 보면 왠지 외로워집니다. 뭐가 그리 재밌냐고 같이 보자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링크를 보내주면 각자의 폰으로 보는 것이 더 편합니다. 간혹 같이 보더라도 취향에 맞지 않거나, 오랫동안 그 콘텐츠를 봐온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이해하려 애쓰다 피곤해져 접습니다.


육아를 하니 콘텐츠를 소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연속극, 주말드라마 이런 단어조차 구식의 것이 되고 이제 OTT에 뭐가 떠서 핫한지 뉴스나 검색을 통해, 혹은 친구의 추천을 통해 보던 시대조차 갔습니다. 똑똑한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면 '그래 네 마음이 내 마음'하며 미디어 편식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반려인과 출산 전 마지막으로 같이 본 드라마가 "그해 여름은"과 "슬의생", "우영우" 정도였던 것 같아요. 갑자기 그때가 그리운 건 왜일까요? 시간이나 잡아먹고 울고 웃고 감정 소비나 하며 시간도둑, 바보상자라며 멀리하려 했던 그 TV가 저는 왜 갑자기 이렇게나 그리운 걸까요?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같이 느꼈습니다. 적어도 그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는 함께 같은 공간에 있었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같은 간접 경험을 했고 같은 엔딩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어디선가 나올 때마다 그 감정을 함께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맞추었습니다. 영화나 TV채널을 선택할 때 한 사람만 보고 싶은 것일지라도 기꺼이 함께 보며 서로의 취향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었습니다. 제가 관심 없던 마블 히어로물이나 신서유기를 빠짐없이 복습할 수 있었고 제 반려인은 디즈니 신작을 챙겨볼 수 있었던 까닭이지요.


공통된 대화 주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뉴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눌 새가 없습니다. 적어도 뉴스를 함께 보는 동안에는 지난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걱정도 분노도 했었습니다만, 지금은 굳이 네이버 뉴스를 검색하지 않으면 세상사에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어도 점점 더 '핵개인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 영화관에 반려인과 손잡고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그런 건 그리 그립지 않습니다. 다만 집에서 잠옷바람으로 뒹굴며 같이 드라마를 몰아보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


흘러나오던 TV에서 나랑 전혀 상관없는 연예인에 대한 얘기를 하며 쓸데없이 보내던 시간들이 그리운 건 아닙니다. 다만 같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할 소재를 던져주던 TV가 그립습니다.


지금 2024년에 TV를 그리워하는 이상한 사람, 저뿐인가요? 다들 정말로 유튜브와 OTT와 함께여서 행복하신가요?


저는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님과 나란히 TV를 보렵니다. 과일을 먹으며 그 재미없는 《아침마당》과 《전국 노래자랑》, 30여 년간 변함없이 눈을 흘기는 아침드라마와 주말드라마를 엄마랑 같이 보렵니다. 아, 나는 TV만 보던 엄마, 아빠가 그리웠던 걸까요. 그 쓸모없던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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