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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율 Apr 09. 2024

뭘 좋아할지 몰라 일단 많이 준비해 봤어

매일 먹는 게 일이고, 낙이고, 전부인 나날들.

자기 주도 이유식을 6개월부터 시작한 걸 후회한 날도, 감사한 날도 많다. 그러나 눈물 흘린 날이 좀 더 많다.

너무 일찍 '숟가락의 주도권'을 넘겨버린 것에 대하여, 후회했고,
일찍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음에, 내 밥을 사람다운 속도로 먹을 수 있음에 내내 감사했다.

일단 나와 아이의 식사를 함께 차려놓고 먹든 안 먹든 던지든 장난을 치든 나는 나의 식사를 하면 되었다.
이유식 초, 중기에는 아이가 숟가락과 음식을 던지더라도 초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식사 예절을 가르쳐야 하는 돌 이후 완료기가 되었다.
안 되는 건 안된다고 알려주어야 했는데, 그러면 아이는 오히려 화가 나서 더 던졌고,
내가 숟가락질을 도와주려 하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니 오히려 손으로 먹으려던 음식조차 던졌다.
그리고 훈육을 한 날에는 눈을 껌뻑이는 행동이 생겨서 안된다고 말하기를 멈췄다. 기분 좋게 장난치듯 웃게 해 주면 오히려 입을 쩍쩍 잘 벌렸다. 같은 음식을 같이 먹고, 먹는 데 함께 집중해 주면 훨씬 잘 먹었다. 여러 가지 반찬을 내어주면 이거 저거 만져보고 던지다가 먹는 양이 적었다. 그래서  다 차린 후, 아이 아빠와의 공유와 기록을 위해 가끔 인증샷을 찍는 경우도 있다. 그런 후에는 딱 한 가지씩만 꺼내서 준다. 먼저 떠먹여 줘 보고, 안 먹으면 혼자 탐색해 먹게 하고, 그래도 안 먹고 장난을 치면 내가 먹고, 내가 먹어도 따라먹겠다고 하지 않거나 음식을 두세 번 던지면 치우고 다른 음식을 준다. 그리하여 코스 요리처럼 긴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름 재미있다. 손이 빠르지 않은 편인데, 한 가지 요리가 되면 먼저 먹게 한 뒤에 먹는 동안 다른 음식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덜 흘린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식사하고 있다는 기분도 좋다.

우선 식재료를 정한다. 씻고 손질하고 자르며 찔 것과 구울 것 혹은 삶을 것과 데칠 것 등을 소분해서 다양한 조리법으로 한 가지 식재료를 요리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양하게 준비해 보는 거다. 처음 두부를 줬을 때, 연두부는 게 눈 감추듯 잘 먹더니, 단단한 두부는 삶아줘도 구워줘도 잘 안 먹더니, 또 얼마간이 흐른 뒤 다시 삶아서 조금 맛 보여주면 또 잘 먹기도 한다. 요리 중에 내 바짓가랑이 근처에서 방앗간에 날아든 참새처럼 눈을 뻐끔거리며 호기심 가득 내가 하는 걸 지켜보는 아이에게 하나씩 맛 보여주며 아이의 배고픈 칭얼댐을 지연시키고, 시장을 반찬이게끔 식사를 기다리도록 준비시킬 수 있다.

그런데 각자의 음식을 따로 먹었던 때보다 내 식사를 집중력 있게 제대로 하기가 어려워졌다. 아이의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내 식사를 시작할 수 있는데, 아이를 내려놓으려면 바닥에 있는 걸 밟고 다니거나 먹지 않게 미리 닦고 아이를 씻기고 기저귀나 옷을 갈아입혀야 해서 그러고 나면 입맛이 없고 아이 양치시키면 바로 재울 시간이 된다.

아이는 내가 떠먹여 주는 밥숟갈을 잘 먹지 않는다.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면 더욱 그렇다. 특히 밥을 잘 안 먹는다.
채소나 계란, 토마토, 아보카도 등은 엄청 좋아한다. 이상하게 바나나나 고구마, 감자, 단호박, 너무 단 과일 등은 별로 안 좋아한다. 신기하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단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이 덕분에 처음 알았다.
뭐든 스스로 만져보고, 촉감이나 온도를 확인하고,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 안전하고 안심이 되면 조금 먹어본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삐뽀 쌤이 잘 먹으면 빨리 배죽을 올리라는 말에 갑자기 배죽을 확 올렸더니 목에 꿀떡 걸린 후부터 순항하던 이유식은 난관에 봉착했다. 진득하거나 뜨거운 음식, 쓴 약먹은 이후 숟가락 거부가 생긴 거다. 엄마아빠가 주는 음식이 언제나 안전하고 맛있는 건 아니라 알고부터 항상 의심하고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이는 집에서도 안전바를 설치해둔 금지된 곳에는 잘 가지 않고, 열지 말라고 안전 잠금장치를 해 놓은 곳은 풀어놓아도 잘 열지 않는 걸 보면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것 같다. 한 번 넘어지지도 않고 충분히 잡고 걸은 후에 처음부터 꽤나 능숙하게 걸음마를 해내는 걸 보아서도 그렇다.

우연히 애기 아빠가 보내준 아이의 이유식 행동 모방 영상을 보고, 음식을 뱉고 던지고 떨어뜨리고 문대는 모든 행동이 이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만국공통이구나 하고 위안이 되었다. 자기주도 이유식을 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이 겪는 문제이겠구나 위안을 삼고 다시 힘을 내 보았다.

'오늘은 대체 뭘 먹이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즐기기로 했다. 자기주도 이유식을 일찍 시작하다보니 다양한 식재료의 원물 스틱을 삶고 데치고 서 주는 것의 연속이었다. 매일 거의 비슷한 식재료와 조리법으로 주다보니 좀 미안해졌다. 잘 먹던 음식도 지겨운 듯 흥미를 잃기도 했다. 최근에는 고기가 그렇다.

누가 식단표 좀 짜주었으면, 식단대로 식재료 좀 사주었으면, 사놓은 식재료 좀 다듬어 준비해주었으면 그런 마음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그런데 시판 이유식은 대부분 가염이었다. 두 돌까지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는 한 나는 아이의 건강을 위해 무염을 고수할 작정이었다. 모든 육아서에서 '신장기능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무염식을 두 돌까지 유지'하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의 공식은 다른 것 같다. 간장이나 소금을 첨가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웠고, 밥을 안먹을 때나 요리하기 힘들 때, 혹은 외출할 때 빨아먹는 레토르트 이유식을 애용하고는 있지만 메뉴가 다양하지 않아 늘 미안했다.

그래서! 그냥 가지고 있는 '아이유매(아이주도 이유식 매뉴얼)' 책을 아무데나 펼쳐서 있는 식재료로 요리하고 책에 그 요리를 해먹인 날짜를 기록하고, 달력에도 그 날 새로 도전한 음식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 날의 우연과 끌림에 맡기는 메뉴 선정. 그리고 그게 하루에 새로움과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평생 요리 경험이 거의 제로인지라 실험하듯 음식을 하고 있지만 부족한만큼 새롭고 재미있게 여기기로 했다. 지난 7개월간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감,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앞으로 몇십년간 해나갈 일이 여전히 아득하긴 하다. 식재료별 보관/손질법이나 조리법별 영양과 맛, 꾸려갈 주방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일은 꽤나 도전적인 일이다.

이렇게 예쁜 식판샷을 찍는 엄마들의 문화를 정말 싫어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주는 식판은 예쁘지 않은 날이 더 많고, 주는 메뉴 중 안먹는 것이 더 많기 문에! 예쁜 식판에 예쁘게 차려주는 건 그냥 엄마 만족이다. 하지만 그 만족이 지속하게 하는 위안과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도닥이기 위해 나도 식판샷을 찍기 시작했다.

안먹는 음식은 갈고 섞어서 김밥으로 만들어 준다. 김효과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요즘, 오늘은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김밥에 계란과 오트밀가루를 입혀 에프(에어프라이어)구워주니 과자처럼 바삭해졌다. 아이가 제일 싫어하는 찐득한 촉감이 없어서인지 정말 잘 먹는 다! 좋았어! 또 당분간은 이렇게라도 밥을 먹여 보리라!

매일매일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지만 엄마는 어떻게든 또 해결방법을 찾아간다.

<도전한 음식 일기 ing>
* 4/6(토) 감자채전&피자, 고구마스틱
4/7(일) 라구소스김밥
4/8(월) 감자우유조림, 고구마채전, 김밥오트밀볼, 라구소스 계란찜

오늘 낫또를 샀으니 내일은 낫또 요리에 도전해 봐야지! 와아, 재밌겠다~~~~~~~(자기 최면중)


'지 밥도 못해먹는 놈이 뭘 한다고.'

귓전에 맴맴 도는 말. 그저 다 내려놓고 요리서만 읽고픈 이유였다. 먹고사는 일이 수월해져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주방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애기 아빠에게서 내게로 조금씩 나누어 가져오고 있지만, 제대로 밥을 챙겨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나와 우리 부부의 식사를 아이의 식사와 함께 차려나갈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기로. 우리의 식사를 잊거나 미루지 않기로.

매일 먹는 게 일이고, 낙이고, 전부인 나날들.

먹이기 위해, 먹기 위해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지금에 감사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만큼은 아니어도 매일의 주방일이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새롭고 감동적이길 바란다.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주는 행복과 익숙하던 식재료의 맛과 매력을 새롭게 알아가는 나날들. 아이는 내게 먹는 일의 중요함과 즐거움을 가르치러 이 세상에 왔다. 아이가 내게 가르치는 무수한 것들 중 가장 큰 일은 잘 먹고 잘 자는 일의 중요성을 잊지 않게 하는 거다.

오늘도 저마다 주방에서, 식탁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실 나와 같은 엄마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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