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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유영 Nov 15. 2020

퇴사기6. 떠나는 이를 위한 선물

'10.26 ~ 10.28 체크인 15시 체크아웃 11시 OOO 호텔'


퇴사 D-14, 여전히 정신없이 바빴던 그날 나는 카톡을 하나 받았다. 그 내용은 비밀 접선을 위한 첩자들의 암호 같았다. 발신인은 남동생이었다. '이게 뭐냐' 묻 동생은 '퇴사 선물'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를 꺼냈다. 퇴사 선물? 그때는 이 낯선 단어가 내가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동생은 4년 간 고생했다며 잠깐이라도 편하게 쉬다오라고 호텔을 예약해줬다.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이었다. 그 카톡을 받기 전까지 퇴사는 나에게 종료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를 표현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대리 OOO'이라는 하나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내면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 뜻밖의 선물은 위로 같았고, 어떤 기념일에 받았던 값나가는 선물보다도 더 큰 감동을 주다.


D-Day, 회사를 나오기 전 그동안 업무적으로  작게 도움을 받았던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돌았다. 행사 때마다 식사도 거르고 고군분투하고 있던 내게 항상 고생했다, 감사하다는 문자를 남겨주었던 나이 어린 주임님은 나의 갑작스러운 작별인사에 주섬주섬 자기 책상을 뒤져 초코빵을 쥐어다. 또 이따금 점심을 같이 먹었던 옆 부서 여직원은 아몬드 사탕을 주머니에 넣어줬다. 그냥 스치기에는 마음 한 켠이 아린 아쉬운 인연들을 생각하며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짐을 싸 나오는 길, 친구는 내 퇴사일을 잊지 않고 마지막 출근을 축하한다며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줬다. 그날은 예의 치례일 수 있는 이 조그마한 표현들이 유난스럽게 맙기만 했다. 나하나가 나의 지나간 하루들을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무수히 스쳐 지나간 동료들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그 사람의 작은 흔적 하나 남지 않더라. 이런 현실을 알고 있기에 떠나면서 후련함보다는 서글픔이 더 컸는지 모른다. 렙의 대리는 한때지만 사랑했고, 부대끼고 애써왔던 곳을 떠나는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 배웠다. 리고 나 또한 자리를 떠나는 누군가에게 퇴사 선물을 가장한 위로를 해주리라 마음먹는다.


10년, 20년 버텨왔던 인생의 선배들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혹여나 지금 퇴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곳에서 당신의 시간은 찬란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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