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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유영 Nov 09. 2020

퇴사기5. 단순 노동의 재평가

가정용 오븐을 구매했다.

퇴사를 결심한 후 부쩍 생각이 많아지고 조바심이 생긴 나에게 내려진 특단의 조치였다. 나는 달달하고 촉촉하게 구워진 초콜릿 쿠키를 커피와 곁들이며 멍하니 창 밖을 구경하는 느긋한 주말을 상상하곤 했다. 그래서 한때 회사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제과학원을 다닌 적도 있었다. 이후 베이킹은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이래저래 미뤄왔었는데 마침내 퇴사를 기점으로 그 꿈을 실현할 때가 온 것이다.


베이킹은 여유로운 취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의 상상과 조금 다르다. 재료를 준비하고, 개량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부산스럽다. 반죽을 치대고, 거품을 내는 일은 손목이 빳빳하게 굳을 정도로 많은 힘이 들어간다. 또 오븐 속에 반죽을 넣고 굽는 과정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덜 익거나, 예쁘지 않거나, 태워버려 앞에서 거쳤던 모든 수고를 수포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맘먹고 구매한 컨벡션 오븐은 좁은 주방에 조리대 한켠을 떡하니 차지했다. 딱 봐도 베이킹을 하며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백수가 되리라는 포부가 느껴지는 사이즈였다. 그리고 그 주말에는 정말 오랜만에 마들렌과 초콜릿 쿠키를 구웠다. 역시나 많은 재료와 도구가 등장했고, 그 덕분에 정신이 없어져 우왕좌왕 실수를 연발했다. 집 바닥은 박력분 가루로 엉망이 됐고, 싱크대에는 설거지 감이 잔뜩 쌓였다. 마들렌과 쿠키가 다 구워질 때쯤 조금 여유가 생겨 거울을 봤더니 얼굴은 기름 범벅으로 찌들어 있었다. 우습게도 쿠키가 완성됐지만 커피를 탈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베이킹을 하는 동안 회사나 퇴사, 내 미래에 대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잔뜩 힘을 쓰다 보니 이직에 대한 두려움도, 내 선택에 대한 불안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나는, 아니 나 같은 생각쟁이들은 가끔 생각의 담을 넘는다. 사고는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생각이 계속되면 되려 감정을 지배하곤 한다. 지나친 우려로 실의에 빠지게 만들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상상해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생각의 담을 넘은 과한 생각쟁이들에게는 베이킹 같은 단순 노동이 하나의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빵을 굽거나, 집안일이나 인테리어에 몰입하는 일. 화초를 키우거나, 그림을 배우는 것처럼 낯선 일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나는 베이킹을 하는 동안 문제를 잠깐 잊을 수 있었다. 이후 다시 '내 문제'에 접근했을 때는 '감정'이라는 기름기가 쏙 빠지고 '문제의 본질'만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가끔 인스턴트커피를 미친 듯이 저어 달고나 커피를 만드는 것처럼 소모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객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비생산적인 일이라 치부됐던 달고나 커피 만들기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생산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재평가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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