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이끄는 무리와 함께 가나안을 향하듯
요즘 힙하다니까 꼭 가봐야겠다. 게다가
브루클린 브릿지를 '걸어서' 건너는 게 유행이란다.
걷는 것에 내가 빠질 수는 없다. 절대로 놓치면
안 되겠다, 해서 왔는데 역시 인기 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진짜 걸어볼 만하다.
다리 한가운데에 인도가 차도보다 높게 설계되어 있어서, 걸을 때 차에게 방해받지 않는다. 옆으로 고개를 내밀면, 다리 위를 지나는 차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바닥이 나무인 것도 인상적이다. 양 쪽 방향 모두, 걷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타임 스퀘어, 브로드웨이처럼 붐비지만, 바다 위에 있어서 그런지 뭔가 좀 더 여유로워 보인다. 깔끔하고 힙한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멀리 바다 건너온 이민자들이 이 다리를 건널 때 어떤 심경이었을까? 성경에 나오는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느꼈던 그런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다리를 건너 저곳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천국 같은 세상이 열릴 거다,라고 믿지 않았을까?
내가 무리에 휩쓸려 걸어가는데 그런 느낌이 들더랬다. 뭐 돌과 나무로 만든 브리지의 생김새와 색감이 그런 시대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든 것 같다. 별생각 없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인파에 휩쓸리게 되자, 나도 이 다리를 쭉 따라 걸어가서 저 문을 곧 통과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기는 것 같다.
브루클린 브릿지는 뉴욕 맨해튼과 브루클린 다운타운 사이의 이스트강을 가로지른다. 1883년에 개통되었고,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고, 뉴욕시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또한 최초로 강(steel) 케이블을 사용하였다.
아침에 10K 뛰고 걷고 그 뒤에도 5K 넘게 걸으니 이제 발이 힘들다 소리친다. 그래도 맘은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제대로 휴가를 누리고 있다. 내 방식대로, 서두를 필요도 없이. 그렇지, 이거 하러 온 거잖아. 아이들은 수련회 잘하고 있겠지? 또래들이 제일 좋을 때니까 나랑 여행하는 것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을 거다. 나도 아이들도 지금 있는 곳에서 더 무르익어 가고 있다.
걷다 보니 덮다. 더 일찍 나와야 했었나 보다. 그렇다고 코리아타운의 밥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날 비 맞으며 그리워했던 한국 음식을 늦지 않게 먹어주어야 했다. 걸어야 하니 든든하게 먹고 온건 정말 잘한 일이다. 그래도 땡볕이 더 심해지기 전에 온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원래 루즈벨트 아일랜드 트램을 타고 밥을 먹고 이곳에 오려고 했는데, 몸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밥을 먼저 먹게 되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먼저 봐야 할 것 같아서 더는 고민 없이 트램을 포기하고 왔다. 이 땡볕에 나온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단지 어제 장대 비에 두들겨 맞았던 두피가, 오늘은 햇볕에 달굼 당한다는 게 좀 가엾을 뿐이다.
불쌍한 내 정수리, 쉼이 필요한 내 다리. 다리 중간쯤에 있는 큰 기둥이 만든 그늘에 기대어 앉아본다. 아무도 앉아 있지는 않지만 괜찮다. 여긴 자유로운 미국이다. 내가 앉아서 경치를 즐기고 있으니 곧 몇몇 사람들도 그늘을 찾아 앉는다. 어제 늦게라도 우산을 샀으면 그때 얼마 못 쓰더라도 오늘 양산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라며 또 말도 안 되는 후회를 잠깐 해본다.
한참을 앉아서 여행객들이랑, 바다, 저 멀리 빌딩들을 바라본다. 여유롭고 고요하다. 너른 마음으로 멀리서 바라본 도시는 더 이상 걱정이 없어 보인다.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스치던 그 느낌이다. 다 개미 같고나. 별거 아닌 일에 마음 써 온 것이었구나. 다 부질없다, 이제 전부 놓아주자.
힘을 내서 좀 더 걷다 보니, 노점상이 보인다. 방금 다리 위 과일컵 가게를 지났다. 뭐가 더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은 곳, 거대한 다리 위, 사람 걷는 길 중간에 모자만 파는 노점상도 있다. 이건 나를 위해 예비하고, 내가 오늘 이 시간 이 다리를 땡볕 아래 걸어갈 때까지 기다려 준 듯하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점점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해만 좀 막아도 살겠다. 현금을 들고 나오기 잘했다. 5불에 이렇게 행복해진다. 그리고 모자 디자인이 꽤 괜찮다. 타임스퀘어 주변에 파는 기념품 가게에 있는 거랑 똑같은 것 같은데, 여기 땡볕아래인 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좀 더 저렴하기까지 하다.
여기까지 몇 백개 모자를 전부 다이고 걸어왔을 모자장수 아저씨에게도, 태양 공격을 잘 막아낼 방패를 정수리에 선사한 나에게도 윈윈이다. 여행객들만 쓰고 다닐 법 한 NEW YORK 자수가 크게 박힌 모자를 쓰고 행복해졌다. 소비는 왜 이리 즐거운지. 미니멀리즘이 멋있어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 난 이런 작은 소비에도 민망하리만큼 쉬이 기분이 좋아진다.
햇볕 같은 작은 성가심에도 내 마음은 왜 이리 요동치는가. 다시 한번 건강을 더 잘 돌보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렇게 본능에 약해지지 않으려면 더 건강해져야 한다. 아주 사소한 불편에 더 이상 몸이 크게 반응 못 하게, 무조건 체력을 더 길러야 한다. 그래야 오래오래 더 건강하게 여행 다니지.
단백질, 야채도 더 챙겨 먹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운동하자. 그리고 많이 웃자. 좋은 생각만 하자… 적고 보니 다시 무슨 태교라도 하는 듯 해, 혼자 킥킥대게 된다. 그래, 아이를 길러내 듯, 이제 나를 정성껏 길러내 보자. 이제 노쇠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좀 서글퍼지는데, 이제라도 정성스레 뱃속 아이 다루듯이 나를 자라게 해 봐야겠다.
브루클린 다리에 걸어놓은 자물쇠들.
귀엽다. 뭘 그리 걸고 싶었을까.
뭘 간절히 바라고 걸어놓은 것 같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 찾아보니 사랑을 약속하는 징표란다.
뜻을 보니 귀엽다고 생각한 마음이 싹 가신다
무언가 가두는 느낌이 들지 않나?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꼭꼭 가두려고 할수록, 내가 움켜쥐려 할수록
손안에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듯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읽고는, 지적인 충격에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꽃을 꺾어 내가 소유하느냐 아니면, 꽃 존재 자체를 기뻐할 거냐는 '소유 to have'와 '존재 to be'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세상에! 뭔가 그동안 내가 어렴풋이 느껴온 것들을 잘 정리해 놓은 것 같았다.
그래, 난 그런 사람들이 불편했었다. 여기 이 꽃이 예쁘다며 꺾어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의 가책 조금도 없이 손에 잠깐 들고 있다가 버리는 그런 사람들… 그 생명에 대한 미안함은 없는지. 그 예쁜 걸 봤을 때 내가 잠시라도 그걸 소유를 했어야 했는지. 어차피 몇 분도 안 되어 버릴 거면, 그냥 꽃을 그 자리에 아름답게 존재하게 둘 순 없었는지. 이기적인 그 모습, 나는 없는지 또 돌아본다.
헤어지자는 애인을 살해한 흉악범의 뉴스를 가끔 듣는다. 그는 살해한 대상을 단지 "소유"하고 싶었을 뿐일 거라고 추측한다. 어떻게 사랑한다면, 사랑했다면 그 이를 자기 손으로 죽음에 밀어 넣겠는가. 사랑이라고 착각한 소유욕일 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자주 소유욕과 사랑을 혼동할 때가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조심하려고 하는 부분이다. 배 아파 낳아 힘들게 기르다 보니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내 생각대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특히 아이가 어릴 때에는 내가 더 옳다고 생각하고 그 아이만의 생각보다는 경험 많은 내 생각대로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남부럽지 않게 잘난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엄마로서의 성적표로 생각되어, 엄마가 아이의 삶을 재단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영어 유치원에 대한 논쟁은 해묵은 것이고, 요즘은 '7세 고시', '4세 고시'라는 우스갯소리도 듣는다. 그렇게 자라난 트로피 키즈들은 사랑과 정성을 주었다는 부모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어떤 결핍만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던 옛날 광고 카피도 떠오른다. 이런 자물쇠로 사랑을 꽁꽁 잠가버리려는 이에게 외치고 싶다. "그 사람이 니 거야? 네가 그럴수록,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뉴욕시에서도 이 자물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게 등의 문제로 인해 철거를 한 적도 있고, 적발 시 벌금도 100불이나 있다고 한다.
그러한들, 전 세계 유명한 관광명소에 가기만 하면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랑꾼들이 눈하나 깜작하겠냐 마는, 혹시 저기 자물쇠를 걸어서라도 내 사랑을 끝까지 쟁취해내고 싶은 사람들은 잘 생각해 보라. 그게 정말 상대를 사랑해서 인지, 상대를 소유한 자신의 모습이 필요해서인지. 정말 사랑한다면 함께 존재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사랑이나 꽃에 대한 소유 또는 존재에 관한 생각을 더 펼쳐본다. 최고의 명소에서 반드시 사진 남겨 "소유" 하고 말겠다는 다짐들, 이 여행지에서는 유명한 이곳을 정복하듯 꼭 보고 가야 한다는 마음 가짐도 존재보다는 소유에 치우친 마음이 아닌가.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에 대한 소유와 존재에 관한 것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물건들이다. 최신 기기를 "가지면" 더 행복할 것이라 충동하는 문화를 우리는 어색해하지 않는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달콤하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에 우리를 쉽게 내어준다. 그 자본주의가 주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고, 존재 자체로 충만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 본다.
자물쇠 정도는 애교였다. 좀 예쁘기까지 했다. 그런데 머리끈과 천, 생수병 플라스틱 라벨까지 묶어놓은 곳은 정말 지저분해 보였다. 제대로 시각공해이다. 제발 이런 건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맘이 간절해진다.
덤보, DUMBO는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약자이다.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리지 사이에 위치한 브루클린의 한 지역이다. 맨해튼과 가까운 위치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공장과 창고가 밀집한 지역이라고 한다. 1980년대부터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의 힙한 브루클린이 되었다고 한다.
브루클린 다리를 다 건너서 길을 따라 모두가 가는 곳으로 휩쓸려가면 금방 덤보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장소가 나온다. 모두가 인스타 사진을 위해서 들린다는 그곳. 이 스팟이 유명해진 계지는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영화의 포스터 때문이라고 한다.
브루클린 하면 떠올리게 되는 영화 포스터.
미국 이민자, 가난의 명암.
큰 건물 사이로 화려하게 보이는 맨해튼 브릿지와 그 아래 험한 동네를 걸어가는 가난한 이민자들, 그들의 고된 삶을 다룬 영화. 미국 이민 초기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그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런 역사를 듣고 나니 나도 그곳에서 사진 한 장은 찍어 보고 싶었다. 내 사진 말고. 나는 ‘사진 찍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재밌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
이제 정말 쉬고 싶다. 시원한 곳에서 뜨거운 커피와 함께. 지도 앱을 꺼내어 카페를 검색한다.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들어가 보는데 커피숍이라기보다는 브런치 가게에 가까운 곳들이다. 아기자기하고 앉아서 쉬며 글 잠깐 쓸 수 있는 조용한 카페면 좋겠는데, 들어간 곳마다 사람이 미어터진다.
관광명소에서 조용한 커피숍을 찾는다는 게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럼 좀 시끄러워도 분위기 좋은 커피숍을 찾자. 눈을 낮추고 찾아보아도 가는 곳마다 아니다. 더 걸을 힘도 없다. 지친 마음으로 여기도 뭐 있겠어? 하고 들어간 곳에서, 유레카를 외쳤다.
% ARABICA.
20 Old Fulton St Brooklyn, NY 11201
딱 원하던 카페를 찾았다. 큰 아치형 창문과 벽돌 외향이 내가 찾는 곳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안에 들어가니 만족이 더 커진다. 심지어 내가 들어갔을 때 사람도 많이 없었다.
커피 맛도 정말 좋다. 드디어 좋은 카페를 찾은, 엄청난 행복함이 몰려온다. Dumbo 근처 커피숍 여러 곳 기웃거렸으나 난 여기가 제일 좋다. 아 행복하다.
앉은 자리 옆에 있던 몬스테라랑, 예쁜 건물 밖 사진을 못 남긴 게 아쉽다. 감정이 격할 때는 오히려 사진을 골고루 많이 남기는 걸 깜빡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커피숍을 발견하고는 맛난 커피 음미 하느라고, 지친 다리를 쉬게 하느라고 바빴다.
또 이제 왔던 길을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하느라고 폭풍 검색하느라고 그랬나 보다. 그래, 이 커피를 받아 들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는 돌아갈 길 궁리하느라 많이 바빴다. 메트로 카드만 믿었는데, 버스로 되돌아가는 방법은 간단해 보이지가 않는다. 더 이상 걷진 못하겠다.
뒷 일 생각 안 하고 걸어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돌아가지?
- 곧 < 대책 없는 P가, 신나게 뉴욕 여행하는 법>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