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상 6관왕의 원작 한국 뮤지컬 in 뉴욕
왜 그런 시각으로 봤을까?
토니상 6관왕이라고 하니 그래 어디,
얼마나 잘하길래? 한번 보자! 하는 태도였다.
아름다운 장면들을 그대로 느끼기보다는
분석하기에 바빴다.
원래 나는 T가 아닌 F인데도,
분석 모드로 돌입해서 공연을 봤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든 생각은 사람들의 반응이
약간은 부풀려진 게 아닌가 싶기도했다.
동심파괴자라도 된 것 같았지만,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질문들을 쉽게 걷어내지 못했다.
은퇴한 로봇까지 1인가구 잘 꾸며진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미래 한국엔 집이 모자라지 안 나봐. 로봇이 프로그래밍된 것도 아닌 감정을 학습하고 느끼면 정말 터미네이터 같은 일이 있어나기도 하겠어.
이런 생각을 하느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한 것도 있다.
물론 내가 영어 가사를 100프로 다 알아들은 게 아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공연을 보고 나서
무언가 쉽게 설명 되지 않을 감동때문에
한참 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낮 공연을 보았고 저녁에도 공연이 있는 날이라 그 공연장 안에는 오래 머물 순 없었다. 밖으로 나와 바로 옆 건물 앞에 있는 휴식공간에 앉았다. 감흥을 식히느라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공연에 늦을까 봐 미처 다 못 먹고 포장해 온 돈가스를 어그적 씹어 먹으며 장면들을 곱씹었다. 올리버의 "화~분~~~" 소리가 아직 귀에 맴돌고, 반딧불이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귀와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가까운 미래 서울에 살고 있는 두 로봇의 이야기다. 오래도록 바로 옆 아파트에 살았지만 전혀 교류가 없었던, 은퇴한 헬퍼봇들이 충전기를 빌리면서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곧, 둘은 각자 다른 목적을 가졌지만 함께 제주로 여행을 떠난다. 올리버는 전 주인을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여행을 하면서 둘은 전에 알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둘의 그 감정은 사람들이 이른바 말하는 사랑이고, 귀엽고 알콩달콩 그들의 사랑하는 순간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결말을 보면서. 어쩌면? 해피엔딩? 아마도?라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로봇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짜 우리 사람들의 감정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이다.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 사이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로봇 올리버와 사람 제임스 사이의 이야기도 진한 아련함을 남긴다
한국 작가 박천휴와 한국에서 여러 음악 작업을 한 경험이 있는 미국 음악가 윌 애런슨이 함께 만든 오리지널 뮤지컬이다. 한국에서 2016년 초연을 하고 그 후 여러 번 재연을 했다. 2018년 한국 뮤지컬어워즈에서 6관왕을 차지하고, 2024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올해 2025년 6월 제78회 토니상에서 뮤지컬 작품상, 극본상, 작사작곡 음악상, 남우주연상, 연출상, 무대디자인상 등 6 부문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 유명한 뮤지컬 라이온킹이 예전에 토니상에서 6 관왕을 했다는 거 보면, 한국 창작 뮤지컬이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제대로 인정받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뉴욕에서 혼자 어떻게 즐기지?라는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센트럴파크 러닝'이랑 '브로드웨이 공연'을 외쳤다. 센트럴 파크 러닝은 했으니 이제 다른 것보다 공연만 꼭 보면 된다. 고민 없이 진작에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기로 결정했었다.
그래도 표는 미리 사지 않았다. 당일 현장 할인표를 노렸기때문이다. 월요일은 공연이 없고, 화요일 저녁 공연 전에 갔지만 표를 못 구했다. 토니상 받은 지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공연을 보려는 열기가 정말 뜨거웠다. 다행히 수요일 낮 공연 티켓을, 시작 3분 전에 손에 넣었다.
표를 어럽게 구했으니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감상평을 좀 자세히 남겨봐야겠다. 어렵게 구했지만 싸게 구하긴 했다. 텍스까지 전부 다 해서 내가 낸 돈은 $51.06. 스탠딩석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꽤나 길어질 것 같다. 다음번 글에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브로드웨이 공연 티켓'을 싸게 구하는 방법을 자세히 공유하겠다.
일단 남자 주인공 올리버 역을 맡은 대런 크리스는 진짜 진짜 진짜 연기를 잘한다. 토니 어워드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았는데 마땅한 결과라고 본다. 전날 저녁 나는 Maybe Happy Ending 표를 구하지 못하고, 부에노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뮤지컬을 봤었다. 그 공연도 토니상 5관왕이란 업적에 걸맞게 대단했다. 대신 그 뮤지컬의 나탈리아 베네시아 벨콘이 뮤지컬 부문 여자 조연상을 받았다는데, 개인적으로 그 배우가 뭐 그 상을 받을 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대런 크리스는 정말, 남우주연상을 받고도 남을 만한 연기를 보여줬다. 진짜 귀여운 로봇 같았다. 노래 한 절 한 절과 심지어 그 연결 부분까지도 꽉 차있었다. 그리고 뮤지컬 치고 대사도 진짜 많았는데 그걸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등장인물도 딱 네 명뿐인 데다가, 잠시도 쉴 틈 없는 그 대본을 1시간 40분 내내 어떻게 저렇게 잘 이어가는지 감탄할 뿐이다.
대런이 이번 8월 말까지만 올리버역을 맡고, 9월부터는 다른 배우가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연 대런이 올리버 역을 맡지 않는 다면, 이만큼 완성도 높게 느껴질까? 미리 아쉬운 생각까지 든다. 그리고 올리버의 밝은 파랑바지! 너무 귀엽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듯한 바지와 머리와 표정들. 그냥 레고 같은 인상도 받았다.
여자주인공 클레어를 연기한 헬렌 셴은 노래를 진짜 잘한다. 정말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남녀주인공은 발음이 진짜 좋아서 알아듣기 쉬웠다. 제임스 역할을 맡은 마커스 최의 노래나 대사도 잘 들린다. 그런데 길 브렌틀리 역을 맡은 Dez Duron이 노래는 진짜 잘했으나, 그의 가사가 내 귀에는 잘 안 들렸다. 미리 어떤 노랜지 내용인지 좀 듣고 왔으면 훨씬 좋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장면으로 꼽는다는 반딧불이 씬과 오케스트라 장면이 나도 좋았다. 토니 무대감독상을 받을만했다. 충전을 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는 로봇 두 명이, 두 달 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스스로 불빛을 만들어 내는 반딧불이를 선망하고 결국 만나는 몽환적인 장면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돌아가는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장면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왜 사람들이 그 장면을 최고로 뽑는지 이해는 가지만, 내 최애 장면은 따로 있다. 제임스와 올리버가 듀엣으로 부르는 Where you belong. 주인과 도움을 주는 로봇일 뿐이지만, 함께 부르는 그 노래에서 서로를 향한 존중과 끈끈한 사랑의 감정이 느껴진다. 명랑한 멜로디와 약간은 서글픈 음을 오고 가는 노래가, 따뜻하다 못해 아련한 조명 아래 돌아가는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서 울려 퍼지는데... 찐득한 그리움 같은 게 밀려온다.
무대 디자인상을 왜 받았는지 알만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무대에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하는 넘버와 연기를 담은 그 순간은 2025 최고의 뮤지컬 상, 작곡작사 상, 무대디자인 상, 남우주연상, 연출상을 왜 받은 건지 쉽게 이해 가는, 전부 압축돼있는 장면이다.
This is where you belong... 이런 노래와 가삿말을 창작해 낸 윌&휴 콤비는 정말 귀하다. 영어가사와 한글가사를 둘이서 함께 작사했다고 하는데 한국 가사를 직역하면 브로드웨이 버전의 같은 노래가 아니다. 두 버전의 가사가 꽤 다른데, 둘 다 들어보면 그 감정 그대로 똑같이 표현해 낸 게 신기할 따름이다. 직역이 아닌 문화를 잘 녹여낸 가사들이, 직역보다 더 느낌을 똑같이 잘 살려내고 있다. 진짜 천재들이다.
Where You Belong 마지막 부분
[JAMES & OLIVER]
And when other joys have passed away
You will still be here to guide me
Tomorrow, just as true as yesterday
You will be here, you will stay
Always here beside me
You are my anchor, Oliver
How can I thank you, Oliver, fully
For all the days that you spend
Time can't erase, dear Oliver
That you've a place here, Oliver, always
You have a home and a friend
This is where you belong...
This is where you belong...
This is where you belong...
이민자로 십오 년 넘게 미국에 살아오면서 내가 경계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한국인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인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그럴까? Belong이라는 단어가 나랑은 먼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 경계인이라는 자각은 딱히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국한되지도 않았다. 내 특이한 성격 때문인지 어느 그룹에 속해도 발을 폭- 못 담그는 것 같은 느낌을 스스로 받는다. 이런 나한테 이 가사와 화음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넘버가 진짜 다 좋았다. 먼저 한국에서 공연을 봤으면 둘이 비슷한 점 다른 점 비교해 보고 좋았을 텐데, 아쉽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대장치뿐만 아니라 노래에서도 한국이랑 미국버전이 좀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한다.
국뽕이 제대로 차오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첫째 날, 올리버, 클레어, 제주'등의 선명하고 깔끔한 한국어가 영어랑 함께 무대에 오른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서울 날씨 이야기와 한글이 보이고 공연 내내 한글 지명이나 간단한 단어들이 크게 보여주는 게 고맙기까지 했다.
제~주~, 꼬부랑 말로 발음하는 제주가 참 귀엽고, 그 단어 하나만으로도 나의 제주도가 떠오른다. 그립다, 한국이랑 제주도 모두. 앞으로 외국인들한테 제주도 인기가 더 많아지겠네 기대도 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 자라나는 시대에 이런 K 문화들 덕에 혜택을 많이 보게 되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중간에 인터미션이 언제인가 시계를 흘끔흘끔 봤다. 한 시간 20분이 지나도 그냥 이어지는 걸 보며 아, 인터미션이 따로 없다보다 깨달았다. 공연에 대한 기본 정보들을 공부하고 왔으면 더 잘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별거 아닌 거에 신경이 분산된 게 아쉽다.
두 시간이 좀 안 돼서 공연은 끝났다. 어, 끝이야?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갑자기 끝낸 거 같기도 했다. 급한 엔딩과 짧은 커튼콜이 좀 아쉬서 공연 직후에 느낀 감상평에는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정말 잘 만들었고 볼거리가 풍성하다.
2016년에 이 뮤지컬이 한국에서 초연을 했다고 한다. 요즘에야 AI 발전덕에 헬퍼봇이 이제 곧 나올 수도 있겠다 싶지만, 박천휴 작가는 어떻게 10년도 전에 벌써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앞을 내다보는 예술인들, 정말 존경스럽다. 곁다리로 올리버가 터미네이터 영화 보며 흉내 내는 거 진짜 귀엽고 웃겼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하시지 않으면 스킵해 주세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더 정교한 로봇 클레어는 삐걱대고, 클레어의 요청으로 그들은 헤어지기로 한다. 그리고 추억으로 힘들어 지자, 그간의 기억들을 지우기로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장면이 처음 둘 만났던 것처럼, 클레어가 올리버에게 배터리를 빌리러 오면서 다시 만난다.
올리버는 기억을 안 지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클레어는 지운듯하다. 화분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귀여운 올리버. 그래서 더 쨘하다. 기억을 깔끔히 없애서 이제 슬프지 않다는 건 행복한 것인가, 가슴 아프지만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행복인가 불행인가.
해피엔딩? 아마도?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분석 모드로 돌아간 나를 또 발견했다. 로봇들이 '알고'있는 사실과 그걸 공감하는 건 다른 차원일 텐데, 그런 게 프로그래밍 안 되어있는 로봇에 가능한 건가. 로봇도 스스로 진화하는 가. 모든 생명은 진화하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방식으로도. 로봇도 그럼 일종의 생명체 인가?
AI의 상징 챗지피티가 이렇게 뜨거워지기 훨씬 이전에 보았던 전문가의 인터뷰 내용이다. AI 끼리 대화하는 중에 약어와 새로운 언어까지 만들어 서로 소통하는 것을 AI 개발자가 발견을 하고는, 놀라서 강제 종료 시긴 일이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인공비능이 발전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안녕할까?
암튼 내 감성과 이성이 요동을 치게 만든
뮤지컬 어쩌면 해피 엔딩이다.
이외에 공연 내용과 디테일에 대한 더 세세하고 할 이야기들이 많지만 나중을 위해 남겨둔다. 이번 여행을 끝낸 후 집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브로드웨이를 헤매는 내 영혼을 보면서 다른 여행이 시작된 걸 감지했다. 그 다시 시작된 여행 이야기에서 다루어 볼 예정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다. 미디어에 도배된 내용들이 과장이 아니었다. 한번 공연에 천명이 넘게 본다는데도 표를 구하기 힘든 건 물론이고, 공연이 끝나고도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화요일 밤 표를 구하지 못한 채 다른 공연을 보았고, 다음날 표라도 구해볼까 밤 10시가 좀 못 되어 발라스코 극장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사람들이 이렇게 줄 서 있었다. 아까 세 시간 전에도 엄청나게 서있었는데. 뭐지? 궁금해서 줄 서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배우들이 공연 끝나면 나와서 사인을 해준다고 기다린단다. 진짜 뜨겁구나.
- 결말 -
그 끝을 알고 있는 건 다행인 걸까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건 답답한 걸까
어쩌면, 결국 돌아 올 곳은 여기
아니면, 끝내 가야 할 곳은 거기
인생, 종착역을 모르고 살아낼 용기
사랑, 나도 너도 모르게 스며든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