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가을은 센티멘털의 계절이라,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자 우울감 유발 호르몬이 유난을 떠는지 쓸쓸함과 박탈감, 공허함 따위의 감정을 주체 못 해 청승을 떨고 만다. 타인을 자극해 우울감을 끄집어내어 동감하고자 하거나 남의 불행을 위로 삼으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다 창피해지면 모자란 행동에 계절 탓을 씌워 널려있는 변명을 하지만 변명의 값어치는 딱 그 수준이다. 위로도 뭣도 안 되고 그저 초라해진다. 새삼스레 나는 행복한가. 생각도 한다.
어차피 삶의 궁극적 지향점이 행복이라면, 기왕 태어난 것 재미있게 사는 게 목적이라면 불행의 갓길에 불시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불행과 행복이라는 말 자체는 참 모호하다. 대부분 남에게 보여지는 것, 보일 수 있는 것의 하잘 것 없는 비교에서 행불행의 판단이 갈리곤 하는데, 엄연히 존재하는 행복의 척도, 그러나 이 실체 없는 행복에 따라가기 위해 애를 쓰지만 사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은 엄격히 따져보면 삶의 낭비이며 진실과 별반 관계가 없다. 삶은 전시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위장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 할리 없다. 관심을 사지만 막연한 행복의 조건들은 맨손으로 부를 일으킨 수많은 사람의 성공담만큼이나 와닿지 않는다.
넘쳐나는 외국어 교재가 금방이라도 내 실력을 보장해 줄 듯 유혹하지만 실제 내 입으로 한 마디 시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적당한 괴리감을 가진 채 언제나 내 입 언저리를 떠돌기만 할 것이다. 같은 이치다. 행복을 위한 객관화된 일종의 처세술은 넘쳐난다. 이런 것들이 혹 윤활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 선택권은 본인에게 있다. 어떤 쪽이 됐건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그에 합당한 목표 없이, 의식을 접어두고 어영부영 살다가는 그냥 둥둥 표류하듯 떠다니다가 공연히 내 있는 곳의 수질 탓을 할 밖에.
해서, 행복의 매뉴얼이 떡하니 존재하는 세태에서 좀 튀어보고자 진실에의 목표를 분명히 하기로 결심한다. 스탠더드에 집착해 살다가 자칫 자존감을 잃고 방황하며 세상의 불행을 짊어지는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인간은 되지 않기로 다짐한다.
성능 좋은 엔진을 막 장착했고, 길을 밝힐 헤드라이트도 시원하다. 시간은 넉넉하고 네비에 목적지도 명료하니, 운전자만 똑 부러지면 된다. 사려 깊은 동행자에게 자신의 똥고집을 숨길 위장술은 간간이 들르는 휴게소 정도면 적당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