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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Mar 20. 2023

아무나 와 살 수 있는 성격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열여섯 번째 편지



엄마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 중에 정민이란 아이가 있었어. 중성적인 이름처럼 얼굴도 좀 중성적이 달까, 큰 키에 커트머리를 하고 위아래 청청 패션을 즐겨 입었던 것 같은데-사실 그 시절 유행이어서 엄마도 그런 모습이긴 했지- 웃을 때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한껏 벌리고 크게 웃어젖히는 괄괄한 성미의 아이였지. 그 모습을 더듬는 지금, 그리 오래전의 일인데도 웃는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고 웃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는데 학원을 다니면서 친해졌나... 아무튼 정민이와 나는 꽤 친한 친구였었다.


그리고 다른 중학교를 가고, 다른 고등학교를 가고. 20대 때 유행했던 초등학교 동창 찾기 때문이었는지, 정민이와 재회할 기회가 있었다. 어색한 화장에 여성스러운 옷차림에 머리를 길렀을 뿐 성격은 그대로 좋았어. 한창 이성교제나 결혼에 관심 있을 나이라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 괄괄한 친구는 목젖이 보이는 특유의 웃음을 하하하하 호쾌하게도 웃으며 "나는 아무 하고나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했다.


엄마는 그 말이 좀 충격이었어. 너무나 '루즈한' 남자선택의 기준이, (자신에게 헌신하고 괜찮은 외모에 능력 있는 남자를 원하는) 보통의 20대의 여자가 할 말은 아니잖니. 지금은 엄마가 이렇게 한 번씩 생각이 날 정도로 그 친구가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인정한다.

아... 정민이는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런 자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사람이 결혼을 하려면 가져야 할 단 하나의 요건이 '아무 하고나 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50이 되어도 60, 70이 되어도 아직도 그것을 모르거나 인정하기 싫어 괴로워하는 기혼자들이 차고 넘친다. 그때당시 너무나 의아해 정민이가 글쎄 그런 말을 하더라고 하는 나에게 엄마의 엄마가 그 아이는 어린 게 어째서 그런 말을 하냐던 그 뉘앙스는 분명히 부정적인 것이었어. 너의 할머니는 아직도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버릇처럼 토로하신단다.



싱가포르에 혼자 사는 너의 삼촌이 이제 한국여자를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현지인을 만나볼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거기 사는 한국여자들이 그렇게 돈을 밝힌다는 거야.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줄 수 있어? 명품백을 사 줄 수 있어? 이런 것들을 관계가 깊어지기는 고사하고 만나기 전에 물어대니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거야. 엄마는 가방하나 사주고 만나보면 되지 뭘, 반은 농담으로 말했고 사실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만 명품백이 얽힌 이런 유사한 경험담들을 왕왕 듣다 보니 '나를 잘 대접해 줄 수 있겠어?' 란 표현을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추측해 본다.


언젠가 티브이를 보는데 젊은 기혼의 여성 두 사람이 나와서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선물로 무엇을 받았다, 나만! 서로 경쟁적으로 값비싼 선물들을 열거하면서 자신은 하나 해준 게 없고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았다며 '나만'을 강조하는 그 배틀이 왠지 받치길래 얼른 채널을 돌려버렸다.

남편으로부터 값비싼 선물을 받고 이런저런 대접을 받아야지 좋은 결혼을 했고 아내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없고서야 그런 식의 대화가 가능한 거니. 설사 대본에 의한 연출이었다 해도 이 사회가 가지는 그런 식의 연대의식이 없으면 연출자가 그런 억지를 쓸 수 있었을까.

아직도 남자로부터 무엇이든 받아야 하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요즘의 페미니즘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 아니니. 진정한 성평등은 남자로부터의 그런 대우에서조차 자유로워질 때 가능한 거다. 완전한 성정체성, 인격은 타인에게서 획득되는 게 아니니까. 반대로, 대접하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바라는 남자의 태도 또한 바뀌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겠지. 아직 무의식에 잔재한 남녀 간의 종속적 인식의 변화가 더 가속화되어야 할 것 같아.



뭐, 엄마의 결혼도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비싼 물건들로 대우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입을 계속 대지 않아도 집안의 특정 일을 알아서 자기 일처럼 해주기를 바랐다. 너의 아빠가 응당 엄마에게 맞춰야 한다는 무의식이 분명 있었던, '행동의 대우'를 바랐던 거야. 결혼 초반, 한창 피 터지게 싸울 적에 너의 아빠는 이런 식의 말을 항상 했었다. 에게 다 맞추는데 왜 에게 안 맞춰주냐, 왜 늘 가 하고 싶은 대로 고집하냐. 엄마는 물론 전혀 동의를 못했고. 엄마는 오히려 너의 아빠의 억센 고집과 자격지심 때문에 고통받는다 생각했었으니까. 결국은 우리도 서로를 탓하기만 하고 상대가 바뀌기만을 바랐던 거야. 상대에게 해주기보다 더 대우받길 원했던 거야.


삼십 년, 사십 년을 다르게 살아서 생긴 습관과 사고와 행동방식을 다른 것 그대로 인정해 주고 간섭하지 않고 나의 방식을 주입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상대에게 맞춰줘 버리면 그 안에서 어떻게 첨예한 갈등이 자리할 수 있겠니.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그 '맞춰주는 사람'이 되기 싫어한다.(설사 겨우 맞추더라도 상대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억울함과 자존심 때문에. 그럴만한 가치를 못 느껴서. 그러나 실은 상대에게 맞춘다는 것은 내가 비굴하거나 못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무런 마음의 저어함 없이 상대에게 온전히 나를 맞출 마음을 낸다는 것이 사실은 아주 높은 차원의 자존감이라는 것을 아니?


상대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이 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밀라는 말도 있지. 이런 말은 가톨릭 신자였던 엄마가 어릴 때부터 성경말씀으로 들어 알고 있는데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참는 마음과 착한 태도를 권장하는 의미정도로 알았는데 이 말들의 참 뜻을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알았어.

상대가 오리를 함께 가자 하여 그에 맞춰 할 수 없이 따라가면 주인인 상대에 종속되는 것이지만 거기에 더해서 십리를 가줘 버리면 내가 내 주체적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내가 오히려 현 상황의 주도권을 잡는, 즉 주인 되는 상황으로 반전시키는 거야. 상대가 내 오른뺨을 때리면 그저 나는 상대에게 폭력을 당하는 모욕적 처지지만 내가 거기서 왼뺨을 내밀어버리면 내가 내 뺨을 스스로 내미는 주도적 행위로써 굴욕적 상황을 돌변시켜 버리는 거지.

지난 편지의 시지프스 신화에 대해 기억하니? 신이 너는 평생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려라 했을 때 고통 속에서 죽지 못해 그리 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형별이며 생지옥이겠지. 신의 의도에 다름없다. 그러나 평생 돌을 밀어 올리는 행위는 받아들이되, 그 성격을 형벌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내 의지로써 내가 하는 행위라고 생각을 확 바꿔버리고 주체적으로 고통스러운 그 일을 하는 거야. 여기에 참된 자존감이, 진정한 주인의 길이, 궁극적인 자유인의 길이 있는 거다.

......

이것이 말도 못 하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겠지?


이렇게 남에게 맞춰준다는 것은 깊이 보면 도리어 내가 주체적인 사람, 훼손할 수 없는 자존감을 지닌 이가 된다는 의미다. 진정한 자유인은 자기 아집에 갇히지 않는 사람이고 반대로 우리는 자기 고집 또는 자존심이란 명목으로 항상 어리석음에 갇혀있다.

옆에서 보면 아, 진짜 저 고집 어떡하나 하는데 자기는 소신이라 말한다. 자신은 늘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한다고 자신하고. 그러니 문제는 늘 상대지. 설사 그렇다더라도 상대의 우김질을 큰 마음내서 한 번 받아줘 보어느새 상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나를 발견하게 될 테고 상대방의 변화 또한 시작될 거야.

말만 '내가 맞춰준다'지 내가 한 발 더 나아가는 그 행동이, 결국은 주도권을 내가 쥐어 주인으로서 행하는 내 삶이 된다는 사실에의 인식을 늘 해야 한다. 몸에 배도록.


40년 아집으로 살아온 이 어리석은 엄마는 이제 겨우 이론은 깨쳤다만 실천에의 길이 까마득하구나.



정민이는 결혼을 했을까? 아마 했을 것 같다. 그러면 자신이 말한 대로 누구와 만났어도 잘 잘고 있을까? 요즘 그 지혜를 타고난 아이가 가끔 생각이 난다.

누구는 성격이라는 것이 유전적으로 타고나 고칠 수 없다 말하고 누구는 후천적으로 길러지지만 고치기가 너무 어려워 '천성'이라 일컫는다고 하더라.(어쨌든 성격변화의 지극한 어려움은 다 동의를 하는 거지.)

정신과 의사였나, 심리 상담사였나 정확하진 않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말이-그는 전자를 믿는 쪽인가 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좋은 성격이라고 했다. 많은 재산도 아니요, 좋은 머리도 아니요, 좋은 신체도 아니라 좋은 성격이라니. 수수 많은 사람을 상담하고 치료해 본 그 사람은 돈과 명예와 좋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성격적 문제에 기인한 인간관계의 괴로움에 빠져 사는 수수 많은 사람들을 대해보고 내린 결론일 거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격 좋다고 규정짓는 사람들은 남한테 잘 맞추는 사람이 아니니? 남에게 맞추는 성질이 타고났다면 행운이라 할 만하지 않겠어? 갖은 노력을 해야 얻어질까 말까 하는 그것이 절로 주어진 것이라면 말해 무엇하겠니.


그러나 괜찮다. 타고나지 못했을지라도 방법은 알았으니 연습하면 그뿐이다. 조금씩 나를 변화해 가는 재미도 얼마나 고소한 재민데. 하루하루 성장으로 변하는 나를 보는 것. 내년의 나를 기대하는 것. 느린 성장으로도 '타고남'을 따라잡을 수 있으면 이것도 사는 것의 오진 재미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상대방의 태도와 대우에 따라 나의 행불행이 오가는 종속적인 삶을 그만두고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인간으로 세상의 아무 인간을 쉽게 맞춰버릴 수 있는 (엄마가 그토록 강조하는)'자유인'으로 바로 오늘! 발을 내디뎌보자.

너는, 미리미리 하거라.




MAR. 2023. 엄마의 열여섯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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