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쓴 이 시는 무슨 상인가를 받아 액자가 되어 학교 복도에 걸렸다가 지금은 그 낡은 액자 그대로 할머니의 집 한쪽 벽에 걸려있다. 오늘은 날이 하도 좋아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고 너에게 봄을 닮은 산뜻한 편지를 주고 싶어 앉았는데 참새인지 박새인지 지저귀는 새소리가 또한 하도 정겨워서일까, 오래된 정물로서 인식조차 없이 붙어있던 30년 전의 이 동시가 불현듯 떠올랐지 뭐니.
경칩을 지나자 봄을 느끼도록 바람이, 공기가 바뀌었다. 어제오늘은 별로 두껍지 않은 외투도 버겁게 느껴지고 집안에서 껴입고 있던 두꺼운 옷도 한낮이 되자 벗어버렸다. 두말할 것도 없이 봄꽃들은 제철을 만나 한창 앞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번주 초에는 산의 초입에서 개불알꽃들이 보이기 시작해 아하! 이제 봄이구나 했고 지천으로 깔린 진달래들의 꽃몽오리가 터질 듯 매달린 것을 보며 이제 진분홍색의 환상적인 장관을 곧 보겠다 싶었지. 담장의 개나리는 오늘 보니 제법 봉오리가 꽉 찼고 몇 개는 노랗게 터졌더라. 예전에는 참 개나리를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누구의 과실나무인지 드문드문 심겨있는 매화는 벌써 꽃잎들을 터트려 가지 마다 분홍빛으로 흰빛으로 박혔고 아파트 단지 안의 목련은 아직도 봉우리 졌지만 산 아래의 큰 목련나무는 양지의 단빛 때문인지 벌써 흰 꽃들로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또 동백은 어떻고? 아직까지 봉우리가 더 많기는 하지만 성질 급한 개체들은 벌써 활짝 피어 성급하게 뚝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던걸. 이도는 작년에 어린이집에 등원하면서 통째로 떨어져 있는 그 동백꽃을 절대 지나칠 수 없어해서 매일 두세 개씩 어린이집에 들고 갔었지. 그래서 친구들도 덩달아 동백꽃을 많이 관찰할 수 있었다고 선생님이 애써 좋게 말씀해 주셨지. 올해도 이도는 동백꽃을 그냥 지나치진 않을 듯한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손톱만 한 야생꽃들이 땅에 붙어서 군락을 이뤄 피어있는데 그것들의 고운 연보라 빛깔은 보는것만으로 웃음 지어졌다. 저건 뭐지? 떨어진 플라스틱 조각인가 싶어서 다시 봤던 새빨간 들꽃도 탄성을 지를 만큼 앙증맞았지. 이제 시작이다. 봄은 우리에게 얼마나 보여줄 것이 많은지 이제 여기저기 시동을 거는 참인데 아직 놀라기는 이르지. 벚꽃이 봉우리를 밀어 올리기 시작했으니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천지가 황홀한 흰빛으로 물들 거야. 겨우내 가시 같은 가지들만을 달고서 버텼던 나목들도 이제는 그 싱싱하고 찬란한 연둣빛의 새잎들을 틔우기 시작할 거고. 그 새 생명의 연둣빛은 어느 꽃보다도 예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반들반들하고 윤기 나는 새잎에 또 햇살이 더해지면 현란하게 반짝이는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생명의 빛을 선사하지.
자연의 시계는 놀랍도록 정확해서 봄이 오면 해야 할 일들을 어김없이 착착 해낸다. 이 봄이 얼마나 좋은지. 따뜻하고 포근한 햇살이 실린 부드러운 공기의 이불을 덮고 있노라면 눈이 저절로 아슴하게 감기는 게 그야말로 따뜻하고, 포근하고. 마음과 몸을 어루만져주는 봄의 자상함을 느끼며 봄은 정말 좋은 거구나, 하고 행복해한다. 봄에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 봄을 이루는 아름답고 따뜻한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기억에 남아있는 작년 봄의 풍경과 일상의 일들이 지금과 중첩되어 벌써 일 년이 지나갔음을 새해보다 더 실감을 하면서 엄마는 새삼스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거야. 작년 한 해, 정확히 10개월 안에 엄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빠의 어머니는 70세를 맞이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분들의 70세를 기념하는 일명 금일봉을 준비한다고 꽤나 힘들었고 말이야. 세 분의 칠순을 준비하는 돈이라 목돈임이 틀림없었는데 어쨌든 잘 해냈어. 지난 한 해는 또 가족여행을 많이 했다. 할아버지의 칠순에 울진여행을 했었고 여름휴가도 처음으로 모든 가족이 역시 울진 펜션에서 함께 했지. 할머니의 칠순 기념으로 몇 주 전 통영을 여행했고. 너의 아빠 쪽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숙박을 하는 여행을 사정상 하진 못했지만 부산 근교로 처음으로 나들이를 했고 너의 삼촌이 싱가포르에 살고 있으니 함께 여행하자는 약속을 했지. 이제 코로나도 소원해졌고 해외상품들이 속속 만들어지면서 다시 많이들 떠나고 있으니 우리도 함께 일본이든 동남아든 제주도든 떠날 기회가 있겠지. 네가, 또 너의 사촌들이 몇 살 때까지 함께 가족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청소년기였을 때 시들해져서 끝났던 가족여행이 다시 시작되니까 지금은 참 좋더라.
산을 다닌 지도 일 년이 되었고 엄마의 지인들로 이루어진 목요 미식단 모임도 일 년이 되었다. 봄이 되자 대청소를 하는 루틴이 다시 시작되어 또 옷장을 팬트리를 뒤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결로 때문에 생긴 베란다의 곰팡이를 제거할 적당한 날짜를 짐작하고 있고 작년과 똑같이 손목의 통증을 달고 있어서 힘 좋은 너의 아빠가 대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작년에는 팝업북 만드는 일로 노동을 좀 하고 돈을 좀 벌었고 올해는 두 개의 개인전으로 노동을 해야 하고 돈은 벌어질지 모르겠다.
이도는 말로 다 못할 성장을 했어. 아침까지 구사하지 못했던 어휘를 하원길의 엄마등에 업혀서 해대며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잘하지 못하던 노래도 이제는 제법 박자가 맞게 부른다. 작년가을에 산 내복은 이번 봄이 지나면 못 입게 너는 신체도 컸다. 윗 어금니 두 개도 새로 나고 있고 양말과 신발도 한차례 정리를 해서 작아진 것들을 처분했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어서 이제 여름쯤 되면 기저귀를 떼고 의사표현도 더 능란해지리라 짐작하고 있지. 막연하던 너의 성장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가고 있어서 엄마는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둘째부터는 엄마가 막 기르게 된다는 말 뜻도 이해가 가고. 한 번 해보니까 작은 것 하나에 과신경하게 어쩔까 저쩔까 했던 것들이 다 그럴 필요가 없었겠구나, 싶어. 그러니까 너무 전전긍긍하지 않고 더 여유롭게 아기를 대할 수 있을 것 같달까. 관록이라는 것이 참 무시 못할 것이야. 네가 7,8개월의 아기였을 때 네 배를 뒤덮었던 빨간 점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던 내가 생각이 난다. 네가 어찌 될까 봐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엄마가 여유롭고 편안하고 관대하고, 신체 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노심초사하지 않고,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고, 좀 더 큰 품으로 아기를 대하고 바라보는 마음과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해보니까 좀 감이 오는 거야. 이제야.
어느새 진달래는 돌아와서 제 빛을 형형히 밝히고 있고 이도는 작년과는 사뭇 다른 아이가 되어있다. 엄마는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똑같이 화장기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서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며 대청소 같은 연례행사를 치르고 있다. 매 봄이면 개화하는 꽃들은 그 생에서 몇 번쯤 그것을 반복할까. 진달래는 수명이 몇 년일까. 매 년 똑같은 꽃빛은 육안으로 보는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닌 것일까. 정체된 생명일까, 매 해 다른 생명일까. 문득 드는 의문이다.
엄마는 비록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늙음도 일 년 안엔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드니- 속으로는 많은 생각들의 가지치기를 거쳐 큰 몇 줄기의 가지들만 남겨놓는 작업을 해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변화를 시도한 한 해였어.
비유하자면 한 나무가 뿌리와 기둥이 부실하고 가지가 어지럽게 뻗어 있었는데 효과 확실한 영향제를 계속 주입시켜서 뿌리를 튼튼히 만들고 기둥도 곧고 튼실히 만들고 어지러운 잔가지들을 쳐내는 작업들을 거쳐 잘 자라도록 만들어 놨다는 거야. 그렇다고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심은 나무는 옳은 나무인가, 그렇다면 나는 좋은 영양제를 지속적으로 잘 주고 있나, 샛길로 뻗어나가는 가지들을 잘 정리하고 있나, 점검이 필요한 거지. 웬만한 시련에는 꿈쩍 않을 정도의 탄탄함을 유지할 노력과 각오 정도는 해야 하고. 사계 속에서 모습을 변화무쌍하게 변신시키며 굳건하게 자리에 버티고 섰는 이 산의 모든 나무들을 본받아 애써 심은 나무를 평생 잘 돌보아야지.
그 시작이, 보기 좋게 다듬은 튼튼한 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내가 이룬 보이지 않는 한 해의 성과라고 한다면 너의 성장과 맞먹게 나도 성장을 했다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말하지만 그것은 너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다.
너의 존재를 감사하고 우리의 무사함을 감사하고 내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자연에 감사하며 새 봄에도 엄마의 오늘은 늘 가슴속 올바른 식목으로 시작하고 마감한다.
좀 생뚱맞음으로 마무리하자면 엄마의 초2 때 시가 은근히 운율을 맞춘 것이, 은~근히괜찮지 않니? 후후. 돌아가신 엄마의 외삼촌이 외갓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던 순박한 자연에의 시, 역시 엄만 타고난 자연인인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