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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Feb 14. 2023

다르면서 다 같은 오묘한 섭리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열세 번째 편지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제법 불어 어둡고 추운 날이다.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앉아있는 지금 축축하고 아슴한 추위가 온몸을 감싸 두껍게 덮은 담요를 소용없게 한다. 그렇다고 비는 내리지 않아서 베란다 넘어 시원하게 쏟아붓는 빗줄기 구경은 영 못하고 있네. 따뜻한 우엉차 한잔이 그래도 좋고 바람에 곱게 움직이는 소나무가지가 그래도 평온함을 준다.

내리 삼일을 산에 가지 못했어. 이때껏 비가 안 오는데 그냥 갔다 올걸 그랬나, 괜히 또 마음이 불편해진다. 방금의 온화하던 소나무가지의 움직임이 불안한 출렁거림으로 돌변하여 보이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요즘 산에 가면 엄마는 카메라(휴대폰)를 꼭 챙겨간다. 봄도 아닌데 뭐 찍을 거리가 있어서 그러냐고? 엄마는 겨울산이 이리도 푸른지 몰랐어. 엄마의 예상을 깨고 우거진 소나무 군락이 겨울산을 청명한 푸름으로 장식하고 있더구나. 소나무의 이 우직한 어둔 초록은 땡땡 얼어붙는 겨울의 추위와 어울려 겨울산의 향취를 물씬 배어나게 하지. 땅에는 고사리군락이, 소나무와 고사리 사이에는 아마도 때죽나무일 키 작고 왜소한 나무군락이, 그렇게 켜켜이 삼박자로 푸름을 뽐내니 황량할 거라 예측했던 겨울산을 다시금 바라볼밖에.


소나무가 없는 쪽의 풍경은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들이 켜켜이 레이어 되어 마치 성글지 않은 그물의 장막 같은 그 너머의 도시 풍경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그 풍경들이 어느 날은 아름답고 거대한 모자이크 그림 같았다. 촘촘한 나뭇가지 레이어층의 바깥으로 쪼개져 보이는 아슴한 도시풍경이, 오전의 부드러운 햇살을 입자 반짝반짝하는 그것이, 그대로 자연이 만든 거대한 한 폭의 멋진 모자이크 작품임을 인지한 순간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지. 물론 엄마가 본 그 영롱한 빛과 신비한 분위기를 카메라는 전혀 담아내지 못했어. 기억에 각인시키는 수밖에. 그리고 엄마는 생각했지. 아, 이 좋은 걸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이 동네 사람들은 이 좋은 산을 두고도 뭘 하는 거지? 그와 동시에 따른 깨달음. 그래,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 다 다르지. 이 풍경을 황홀한 모자이크로 느끼는 것도 나만의 일 일거야.




이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아주 많다. 맛있는 음식, 좋은 풍경과 장소, 재미있는 콘텐츠들, 예술 작품, 운동,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 중에 우리가 살면서 다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겠지. 오히려 경험하고 사는 것은 극 소수라 할 수 있겠다. 몇 가지들 중 몇 번 해보고 나에게 맞으면 그것에 집중하고 계발해서 취향이 되고 나의 일부로 자리하게 되지.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 있고 별다른 취향이 없는 이도 있다. 자기 취향대로 그저 본인만 즐기는 사람이 있고 굳이 자기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있지. 전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요즘은 유튜버로 활동하는 전직 걸그룹 출신 어느 연예인은 아마도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었나 보다.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밥에 반찬을 놔주는 사람이라 했다. 자기는 흰쌀밥이 끝까지 희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엄마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 있어. 같이 맛있는 것 먹을 때 자기가 먹어서 맛있는 방식대로 상대도 먹길 요구하는 사람. 쌈에 이거랑, 이거랑 넣어서 먹어봐. 이것에 저것 올려 먹어봐. 엄마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꼭 확인받지. 이것도 넣었어?

그분은 자기 남편과 항상 그걸로 싸운대. 남편은 그게 잔소리 같아 싫고 그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때 꼭 그렇게 훈수를 하는 거지. 엄마도 절대 취향을 권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유독 너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얼마 전에 눈치챘다. 네가 내 접시의 사과를 보고 "엄마, 사과도 먹어봐, 맛있어." 하는데 엄마가 늘 너에게 하는 말이었더라고. 이도야 이것 이것도 먹어봐, 맛있어. 아차! 싶고 또 우습기도 해서 잠시 혼란한 마음이었다.


엄마는 미술작가라 취향이 확고한 사람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나의 생각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하는 일은 그렇지 않고 하기 힘든 일이잖니. 엄마가 작가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근 10년간 소위 큐레이터라 불리는 사람들한테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우리 갤러리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다. 엄마의 동료 작가들이 엄마의 작품을 갤러리들에 추천을 해주어서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들은 말이다. 물론 전시를 열어 줄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이야. 엄마의 그림 스타일은 말하자면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색감이나 표현 방식이 강해서 "한국에는 맞지 않다"라는 말을 아울러 들었지. 웃기지? 도대체 한국에 맞는 것은 뭘까? 개인의 취향을 지나치게 일반화 한 이상한 핑계 말고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했다면 그들 나름의 안목이라 인정했을 텐데. 엄마가 전시했던 독일의 한 미술관 큐레이터는 엄마의 드로잉을 보고 "한국적이다"란 말을 했었지.

어쨌든, 이런 소리들을 들어서 그랬는지 엄마는 개인전을 하더라도 관람객의 반응은 거의 호의적이지 못할 거란 짐작을 주로 했던듯하다. 그러다가 작년인가, 활동증명이 필요해서 웹에 검색을 해봤더니 엄마의 전시를 보고 블로깅한 글이 몇 편 있는 거야! 그래서 클릭해 봤더니, 엄마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나의 작품을 그리도 찬찬히 보고 나름의 파악과 분석을 해서 이, 작가의 마음을 너무도 잘 공감해 주었더구나. 그것은 정말 대단한 보람이었고 또 고마움이었다. 나의 작품활동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개인의 확고한 취향이 아니라 더 보편적이고 따라서 그들의 취향이기도 했던 야.

엄마가 올해 개인전을 열어 좀 이른 복귀를 결심한 것도 나의 활동이 그들의 공감선상에 있다는 확실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계속 작업을 해야 한다는 원동력과 당위성, 예술가로서의 소명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엄마가 외계인도 아니고 뭐 특별히 다른 감정과 취향을 가질 수 있겠니. '나만의 생각이고 작업이다'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엄청난 착각이고 오류지. '보편적 감정을 나만의 색채로 표현한다'가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단지 엄마의 경우는 공감하는 쪽이 소수였을 가능성이 있고 또 시대나 시기가 달랐을 때 또는 다른 문화였을 때 공감하는 쪽이 다수일 가능성이 있는 거지. (이렇게 보면, 당대 공통의 관심사를 잘 포착해 먼저 써먹는 사람이 소위 '시류'를 잘 타는 이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돈을 벌고 인기를 얻고 또 자기실현을 하고.)

요즘 소위 '역주행'이란 키워드가 뜨는가 보더라. 과거에 별로 주목을 못 받았던 특정 대중문화가 시간이 좀 흐르니 많은 이의 공감을 새로이 얻어 다시 인기 있어지는 것. 소수의 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 많은 이들의 시도가 또 창작의 결과물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있을 거야. 그러나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가 아니라 지금도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는 거다.



다 다른 것 같아도 보면 사람은 다 똑같아. 내가 좋아하는 것 남들도 결국은 좋아한다. (엄마의 글에서도 공통의 관심사가 잘 드러난 글에 조회수가 가장 많더라. 시기별로 유행하는 풍조가 있긴 하지만 '돈' 같은 키워드는 역시 사람의 시선을 끌기 가장 좋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자체가 그러니까. 자본주의. 돈이 중심이 되어 굴러가는 사회.)

늘 인기 있는 제품들은 따로 있어 도맡아서 품절이고 맛있는 식당은 사람이 언제나 붐벼서 시간대를 잘 골라야 하지. 다른 이의 행동에 어찌 저럴 수 있나! 경악하다가 내가 비슷한 순간에 처했을 때 아, 그때 그 사람이 이래서 그랬구나, 깨닫게 되고. 서로 사는 지역과 민족이 달라도 민담이나 설화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들이 포착되고 대물림되는 생활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는 늘 반복된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가 봐. 엄마는 심지어는 외국에서 그 나라 두통약을 먹고 싹 나아지는 경험을 하고 아, 나도 어쩔 수 없는 똑같은 인간이구나, 하고 느낀 적도 있다. 후후. 우리가 취향이 다 다르고 개성이 있어도 사람이 가지는 본질과 특성은 또 원하는 것은 결국, 같다는 거지.

바꿔 말하면 사람이 다 똑같진 않단 말도 성립한다. 취향이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도 그중에 또 튀는 이가 있잖아. 대세를 거스르고 싶어 하는 사람. 유행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사람. 시류에 아주 편승하기보다는 자신의 색깔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 분명히 있지.


엄마는 좀 그런 쪽이었던 것 같아. 지금생각해 보면 개성을 묵살하는 우리의 학교시스템에 엄마는 늘 아웃사이더 비슷한 위치에 있었어. 중학교 때, 뭐, 학교에서 형식적으로 주는 독서감상문 상? 독후감 상? 그런 상이 있었는데 아무도 거기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책을 읽지도 않았고 진학과 성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그 상장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상을 독차지 한 사람이 엄마였다.

엄마가 상장에 욕심을 내서 그랬냐고? 전혀. 그 상의 무쓸모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야. 그것이 엄마에게 이득이 되냐 마냐의 계산 없이 엄마는 독후에 감상문을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한 거지. 학교에서 형식적으로라도 그런 걸 내라니 낸 거고 엄마가 잘했다기보다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상이 계속 나에게로 온 걸 거야.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일을 혼자서 계속하고 있는 나를 보며 선생님과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 이런 일도 있다. 중3 때 국영수가 아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있는, 학과에서 미미한 과목(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에서 무슨 과제를 줬는데 엄마는 친한 친구들을 꼬아서 대본까지 직접 써서 연극으로 만들어서 해간 거야. 물론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의 열성에 못 이겨 동참한 친구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엄마는 기본적으로 엄마의 관심사나 흥미에 반응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주류의 분위기가 아니었음은 물론 학교가(학생포함) 호응해 주는 시스템 또한 결코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결코 아니었던 거지. 그렇게 하는 사람이 돌발적인 거고. 그러니 개성을 죽이고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하게 튀지 않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거지.

고등학교 때는 이런 일이 있었어. 일주일에 한두 번 있는 '가정' 과목 시간엔 거의 아이들이 집중을 못했어. 수능에 나오는 과목도 아니고 하니 전반적으로 수업태도가 그리 좋진 않았나 보지? 엄마는 여기서도 특유의 반항정신을 발휘해 항상 중요교과 외 시간을 더 소중히 대했던 듯하다. 가정선생님이 한 번씩 자신의 개인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엄마가 그런 걸 잘 듣고 있었나 봐.(선생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개인사에 흥미가 갔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그 선생님에게는 내가 수업 태도가 좋은 특별한 학생이 되었던 거야. 어느 날, 가정선생님이 복도로 나를 살짝 불렀다. 시험에 답을 틀리게 쓴 걸 내가 고치도록 해줬어. 물론 고치게 하는 어떤 정당한 이유를 덧붙이긴 했어. 그 가정시험 한 문제가 엄마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진 않았겠지만 선생님의 그 행동이 엄마는 의아하면서도 사람이 가지는 심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달까. 그 많은 학생 중에서 그녀를 대우해 준 나에게 그런 식으로 보답하고 싶었을 테지. 이상한 선생님들과 대립한 기억에서 다른 의미의 이상한 선생님으로 상당히 이례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엄마가 이런 이야기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이 사회에 사는 한 또 이 나라의 학교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한, 너의 행동이 튀거나 너의 개성이 도드라지는 것을 학교 안에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란 거야. 엄마가 그런 일들을 무수히 겪었듯, 지금은 더군다나 학폭이란 말이 (끔찍하지만) 엄연히 자리 잡은 시대라 너의 특수성이 더 말살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염두해 두란 말이다. 개성의 발휘가 미움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돌아가는 조직사회에서 너의 생각을 피력하긴 쉽지 않을 거야. 발전을 위해 개인은 무시되고 공동의 성과만이 중요시되던 과거시대의 유산이 아직까지도 잔재해 있어. (그것이 교육에서 더욱 극심하고 그러니 엄마가 더 걱정될 밖에.)

한국사회의 개성을 인정 않는 분위기를 바꾸긴 어려워. 이런 배경을 두고도 너는 어떻게 보석 같은 너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잘해나갈 수 있을까.


여기, 너와 내가 사는 이 땅의 이런 특성을 알고 같이 길을 잡아보자. 시류에 몸을 내맡겨 불행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또 바꿀 수 있는 변화 가능한 것들을 찾아내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해야지. 다수가 동의해 한 뜻을 모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개인(개성)의 -그것이 어린 학생이라도- 존중을 보장받는 사회로의 길을 꿈꿔보자.

그러나 앞으로는 분명 개인이 더 중요해지는 사회가 될 거다. 개인이 개성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서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야. 


그러니 앞으로의 사회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유리한 사회'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인간의 보편성에, 시대의 보편성에 적극 편승하면서도 그것이 나의 개성의 발현과도 동떨어지지 않은 것, 사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그런 일이 될 수 있다.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정과 필요와 욕구위에 나만의 방법으로 건드려서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음식을 만드는 것이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든,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이든, 물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든, 서비스를 하는 것이든 우리가 하는 모든 보편적 행위에 개성을 더하는 것이 미래를 살아가는 법이라는 거야. 똑같이 공무원이 되고 똑같이 의사가 되고 똑같이 '스펙'을 쌓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내 개성이 기반된 독창성, '나만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 대체되지 않는다.


'뉘앙스'를 읽는 것은 또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눈치 있게 요령 있게 대처하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고유한 감수성으로 기계가,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니. 요즘 한창 주목받는 챗 GPT를 봐도 인간의 이런 역할을 더욱 부각한다. 그것은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화 하여 꽤나 그럴듯한 답을 할 뿐, 생생한 경험과 감정을 동반한 어떤, 생기도는 해답은 아직 못 내놓는다잖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쌓인 정보의 데이터도 우리가 대대로 물려받아 우리 안에 쌓인 DNA만 못하다.

눈치 있고 요령 있고 그래서 도저히 패턴화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인공지능에 밀릴 게 뻔한 지식의 싸움에서 얼른 벗어나 더 튀고 더 '사 차원적'이고 더 돌발적 이도록, 자신의 엉뚱한 생각을 마음껏 말하고 또 행동하도록 학생들을 격려하고 독려하고 부추기는 쪽으로, 우리의 교육이 가야 할 길을 다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엄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고, 저 먹는 입은 어찌 저리 지 아빠를 닮았을꼬~'

아빠와 찰떡같이 찍어낸 듯한 네 입을 보고 늘 신기해하면서 생각했는데 얼마 전 너의 아빠가 찍어준 사진에 너와 나의 웃는 눈은 정말 똑같아서 사돈 남 말한 내가 참 무안하더라. 이도는 엄마를 많이 닮았어. 너를 보면 어릴 때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신기할 때가 많다. 너는 너의 삼촌도 많이 닮아서 어떨 땐 이 정도면 거의 환생 수준 아닌가 할 때도 있다니까. 후후.


똑 닮았으면서 묘하게 다른 우리의 얼굴들처럼 말이야, 이 세상 사람들도 묘하게 다르면서 다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자신감 있게 너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모든 이의 동일한 마음선상에 네 개성의 점을 톡톡 얹어서 너만의 세상을 잘 만들어가길 바란다.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타인의 개성과 특수한 집단의 개성을 인정한다면 거기에 첨예한 대립이 어찌 생길 수 있을까. 이런 개성과 특수성의 인정과 이해 위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는 개방적인 마음으로 누구든 만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겠지. 지구 어느 곳을 너의 거처로 정하든 너와 다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라는 편안함을 가지고 네가 직면하는 새로운 일도 익숙한 듯, 이 세상 별일 아닌 듯 자유롭게 살길 바란다.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이 한 번 사는 인생, 하나도 거칠 것도 꿀릴 것도 없다, 그렇지?





FEB. 2023. 엄마의 열세 번째 편지.



세우는 습성. 엄마가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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