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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Feb 21. 2023

반항하는 인간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열네 번째 편지



몇 개월 전쯤 엄마는 아주 충격적인 기사 하나를 읽었다. 엄마가 한창 너로 인한 경제공부를 할 때 알게 된 한 자산운용사 대표가 차명계좌를 이용해 몹쓸 짓을 해서 검찰 조사를 받는다는 내용이었어. 그는 개미들의 선봉장으로 가치투자를 강조하고 올바른 주식투자의 길을 제시하며 금융 교육을 활발히 하는 등 말하자면 바람직한 금융인의 이미지로 인식된 사람이거든. 왜,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잖아. 지난 몇 년간 그의 강의를 듣고 참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말이 일관되고 행동이 일관되고. 그가 대표로 재직해 있는 자산운용사에 너의 펀드를 개설하고자 부산 지점에 갔을 때, 텅 빈 사무실 한쪽 플라스틱 의자에 혼자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놀라움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찾아온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 나누던 모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자리엔 코빼기도 볼 수 없는 '대표'의 이미지와 달리 너무도 소탈한 모습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불법? 차명계좌?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막연히 짐작이 되더구나.


며칠 전 어느 인터뷰 영상으로 불미스러웠던 그 사건에 대해 처음 입을 연다는 그 대표는(이제는 전前 대표다.) 일단 그런 일은 전혀 없다고 했다. 본인도 업계에 몸담은 30년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에게 전혀 인터뷰하지 않고 사실확인하지 않고 그런 기사를 올린 기자가, 그리해서 얻는 이득이 도대체 까, 지금도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고. 너무도 고통스러운 8개월의 시간 동안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할까 주변의 걱정도 있었다고 하더구나. 뭐, 충분히 짐작할 만 하지. 그리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지만 그는 여기 남았고,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하는 금융 교육 쪽으로 활동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협박을 받고 있고 영상이나 기사의 댓글을 무서워서 보지 못하지만 어쨌든 피하지 않고 할 일을 찾아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관습에 틀에 맞춰 사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소위 튀는 것을 별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학교에서 튀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너무 나댄다' 해서 왕따를 당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놀랐다. 그러고 보면 엄마 학교 다닐 때도 또래들과 차이나는 언어를 쓰거나 존재를 드러내는 친구들은 꼭 험담을 당하고 '은따'를 당하고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이었는데 모습이 좀 반항적이라고 '반장답지 않다' 하여 엄마를 제쳐놓고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는 부반장에게 꼭 일을 시키는 선생도 있었다. 웃기지?  


'무엇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는 틀이 잡혀있어 그것이 어그러지면 저항이 생긴다. 회사에선 엄연히 연차에 따라 연봉이 정해진다는 틀이 있는데 그것을 깨고 성과대로 연봉을 지급한 그 대표에게 불만을 가진 직원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자녀의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 열심히 사교육 시켜야  안심이 되는 부모들에게 사교육 시키지 말란 소리도 많은 저항을 낳았을 거야. 수십조 사교육 시장에도 미운털 박혔을 거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차 사지 말고 사치하지 말란 소리도 듣기 싫은 쓴소리였겠지. 쓴 약이 몸에 좋다고 알고 보면 노후의 안정과 안녕을 위한 절제와 대비를 주장한 옳은 소리였는데 말이지. 의도치 않게 관습의 저항에 부딪히면 나도 모르는 적이 생기고야 만다. 

그러니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이다. 까뮈는 소설을 통해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자 했지. 관습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하고 부정당하는 고독한 주인공을 내세워서 말이야.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과 별반 상관없는 일에 어쩌다 끼게 되어,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들뜬 기분-소설에서는 강렬한 태양 때문이라고 한다-에 도취되어 살인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뫼르소는 자신의 행위에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심판하는 재판장에서도 변변한 변호조차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부도덕한 사람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마침내는 사형받아 마땅한 지독한 인간으로 결론지어지는, 자신을 쏙 빼놓고 행해지는 그 장면들을 그저 남의 일처럼 관망한다. 그를 그렇게 몰아간 중요한 근거는 엄마를 양로원에 보냈다는 것, 살인 사건 며칠 전에 있었던 엄마의 죽음에 전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시체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 옆에서 밤새며 담배를 태우고 커피도 마셨다는 것, 그리고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장례식 다음날 애인과 해수욕을 하고 사랑도 나누었다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엄마의 장례식에서는 당연히 울어야 하고 내내 슬퍼해야 하고 당연히 엄마의 마지막 모습도 보고 싶어 해야 하지. 더불어 상실감에 며칠정도는 일상생활을 대로 하지 못해야 하고. 우리의 관념에 벗어난 행동을 한 뫼르소는 지탄받아 마땅한 것이지. 그러나 뫼르소는 왜 그런 것이 문제가 되는지, 특히나 자신의 살인사건에서 왜 사건과 무관한 것들로 지탄받아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거다.

내내 침착하던 그는 결국 폭발한다. 하느님께 사죄하기를 요구하는 사제 앞에서. 보통은 죄인들이 형벌 전 하느님 앞에서 사죄하고 참회하는데 뫼르소는 이미 자신의 죄를 알고 있고 기꺼이 벌을 받아들이는데 거기에서 강요되는 신 앞에서의 참회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들이 도무지 작위적이고 하등 쓸데없는, 인간의 관습적 요구에 불과한 행위들이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거야.


뫼르소는 그렇게 울분을 다 토해내고 이 모든 연극에서 벗어나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이 세상의 다정한 무심함을 늘 맡아오던 바닷바람에서, 소금 냄새에서,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에서 느끼고. 그것만이 진짜다. 본래 어떠한 성질도 가지지 않은 이 세계와 너무도 닮아있는 자신을 인지하자 비로소 해방감이 찾아오고 행복함마저 느낀다.


그의 엄마가 왜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약혼자'를 만들었을까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죽음을 인식하는 노년에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일종의 숙명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고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음을 알게 되지. 죽음에 임박하자 비로소 자신과 진정으로 맞닿은 세계에 안도감을 느낀 그였고 처음으로 애인과의 미래를 그려보며 설핏, 죽기 싫다 살고 싶다 생각한 그였으니까.



까뮈는 뫼르소를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으로 그려놓았다. 세상의 관념을 의식 않고 그저 자신의 일상을 사는 그는 운이 없어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그저 좀 튀는 한 인간으로 계속 살았을 테지.(사실 그는 상당히 친절하고 무난한 성품이다.) 사건 후에라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자기 죄를 어떻게든 축소시키려고 노력했더라면, 조금은 관습의 틀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 안간힘 했다면 사형까진 면할 수 있었을 거야. 뫼르소는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인간세상의 '이방인'으로 남길 선택했다.


까뮈는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함을 알아채고도 자살하지 않고 사는 것을 일종의 '반항'이라고 했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면 도저히 살 수 없는데 죽음으로써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해내야 할 반항이라고 말이야.

신의 형벌을 받아 무거운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신화를 빗대어 말한다. 꼭대기로 밀어 올린 순간 그 바위가 도로 굴러 떨어져 다시 밀어 올릴지언정 매일매일 평생 그것을 반복할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신에, 그러니까 숙명에 반항하는 자신의 '의지'로 똑같은 행위를 매일 반복한다는 거야. 포기하거나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하고자 선택하여 의지로써 해내는 것. 인간은 그런 반항하는 마음으로 생을 살아야 된다고 말한다.



나만의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데 그것이 설사 옳고 바른 일 일지라도 관습에 부딪치는 일이라면 거기엔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또 옳은 발걸음이 세상의 무관심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에 좌절하거나 회의를 느낄 것도 아니다. 세상이 이런데 나만 바뀌면 뭘 해,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다', 이것이 인간의 반항이라고 까뮈는 가르쳐줬다. 내일 비록 세상이 종말 할지언정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행위가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들이 밝혀낸 인간 행동의 존엄함이지.


물론 저항과 무관심에 부딪힐 때 나의 발걸음 한 걸음 떼놓기는 무척이나 어려울 거야. 신에게조차 반항하는 시지프스의 강철 같은 의지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도 먼 일 같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저 대표같이, 관습의 틀을 부수고 나아가려는 이 세상의 수많은 뫼르소들같이, 기존의 저항에 부딪히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부조리함에 반항하며 가고자 하는 그 길을 하루하루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충실한 삶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 단단한 반항이 종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거다. 멋지지? 그래, 생각해 보니 참 멋지다. 건강한 개인의 반항이 더 나은 세상을 이루는 것이.



오늘 밤은, 반항하는 모든 이를 위하여!




FEB. 2023. 엄마의 열네 번째 편지.



하원길의 힙합보이. 엄마가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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