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엄마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왠지 좀 조심스럽구나.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무엇을 믿어라, 말아라 하는 강요의 소리로 자칫 비칠까 그 점이 염려스러워.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종교든 정치적 신념이든 사람이든 너의 마음을 단단히 채워줄 수 있고 그 믿음을 등불 삼아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 이 믿음이란 것엔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있다. 어떤 사상을 또는 사람을 너무도 강하게 믿어 맹신으로 가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어 너를 해칠 수 있거든.
엄마는 믿음에 대해 여러 갈래로 생각해 보았다. 믿음 하면 먼저 떠오르는 종교, 그것 말고 그 변두리의 미신(어쩌면 네가 더 가까이 갈지 모를)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까 싶었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믿음과 그 믿음을 어떻게 봐야 할까에 대한 엄마의 생각들을 엮어내 볼까 해.
엄마의 단견이 부끄럽다만 나중에 너와의 대화 주제로는 썩 재미있을 것도 같은걸! 우리의 대화로 인해이 편지가 깊이있게 완성될지 모를 어떤 날에 대한 기대를 살짝 품어본다.
미신의 세계
미신 : 종교적으로 보편성을 지니지 못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 헛되고 바르지 못하다고 인정되는 믿음이나 신앙/ 과학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거나 비합리적으로 여기는 것을 믿는 것
너의 아빠가 거제도로 며칠 출장을 가 집을 비운 이 늦은 저녁, 엄마는 티브이를 잘 보지 않는 관계로 적막한 우리 집에 -조명마저 어둠침침하다- 새삼스레 무서워졌는지 너는 엄마에게 네 뒤를 바짝 붙여왔다. 눈으로 확인을 꼭 해야 되는 양 절대 안기거나 숨지 않고 앞을 꼭 응시한 채 팔을 뒤로해서 엄마 다리를 꽉 안고 무서워한다. 아침에도 불현듯 무서워졌는지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며 좀 성가시게 했지. 너는 겁이 많은 아이로 소리에 민감한 건 물론 어둠도 무서워한다.
네 나이 때의 나는 기억에 없어서 모르겠지만 엄마가 기억하는 순간의 어린 시절은 꽤 무섬을 타는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나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과 이야기들에 매우 호기심이 많았지. 귀신 이야기를 즐겨 듣거나 하고 '전설의 고향'이나 '토요 미스터리 극장' 같은 프로그램은 무서워하면서 눈을 가리고서라도 꼭 봤으니까. 그러고는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예전에 TV 명화극장에서 방송된 '엑소시스트'를 보고 십자가를 머리맡에 두고 오빠와 꼭 붙어서 잤던 기억이 있다.
요새 문득 든 생각은 밤에 야경을 보러 산에 올라가 보면 어떨까 하는 건데 어둔 밤의 흰 벚꽃은 아주 환상적이잖아. 춥지 않은 요즘 야경도 보고 벚꽃도 보고 산의 밤기운도 느껴보고 싶고 해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도저히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더라. 귀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무서워서. 물론 조명 하나 없이 두껍게 깔린 어둠을 완전히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그보다 그 밤에 사람을 마주칠까 봐 더 무서운 거야. 나는 귀신보다 사람을 더 겁내는 어른이 되어버렸네.
두려움은 막연함과 무지에서 비롯된다.
네가 무서워하는 것은 그래서야. 시계뒤로 가려진 스피커에서 나는 관리실의 안내소리에 내내 우는 것도 윗집, 아랫집의 생활 소음을 무서워하는 것도 네가 몇 개월만 지나면 자연스레 알아 담담해질 두려움이고 캄캄한 방도 불을 켜면 해결되는 두려움이니까.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서 오는 두려움으로소위 미신적 행위들이 발생했다. 긴 기간 귀신, 그러니까 영혼을 당연하게받아들여 조상을 섬기거나 토속신앙을 믿었지.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안녕을 빌었다. 액운을 막음 하려는 의도에서 또는 영혼의 안식을 비는 의도에서 또는 기복의 염원으로천도재나 축원기도, 굿 등이 아주 자연스러운 문화가 됐지. 무지몽매한 인간의 눈으로는 영혼과 연결된듯한 무당은 천시하면서도 범접 못할 부류들이었고. 보편화된 과학적 지식들로 의식을 많이 깨친 지금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란 이유로 무당이나 굿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저 문화유산으로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실제 굿판이 벌어지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당의 '신기'-작두 타기 같은 것-를 보고 그에 추종하여 지불하는 엄청난 금액을 보면 그 명맥이 완전히 끊어질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인간 이성이 첨단을 걷는 고도로 과학화된 이 사회에서도 미신은 여전히 굳건하게 존재한다. 그것이 진짜 있거나 없거나 사실여부를 떠나서 점, 사주팔자, 궁합, 관상, 꿈해몽, 작명, 손금, 타로, 운세 등등 엄마나 엄마 주위사람들 중 열거한 저것들 중 직간접적으로 한두 가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다.
엄마의 친구는 올 일월에 아기를 낳았어. 낳기 며칠 전에 안부통화를 했는데 마침 수술 날짜를 알아보려 한다며 내가 제왕절개 수술할 때 언제 수술할지 날짜를 의논했냐고 묻는 거야. 나는 물론 (의사와)의논했지, 병원 스케줄에 어느 정도 맞춰야 하고라고 하자 아니! 철학관에 가서! 하는 거야. 엄마는 잠깐 벙벙해졌다가 아직도 아기 낳는 날짜를 그렇게 잡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산부인과 의사도 엄마에게도 혹시 따로 받은 날짜가 있냐고 물었었거든.
엄마의 또 다른 친구는 딸이 여섯 살인데도 말이 또래보다 많이 늦어서 애를 태우다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가서 그에 관해 물어봤대. 믿는 사람은 그렇게도 한다는 친구의 말에 엄마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미신이라 말하는 것들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물론 하는 사람들은 미신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십중팔구 자신의 현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생겨서야. 여기엔 운명론이 자리 잡고 있다.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방책을 좀 알아서 대비하거나 미래를 바꾸겠다는 거지.
무지와 막연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쫓으려고 미신행위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신통한 능력자의, 제삼자의 힘을 빌어 나의 두려움과 답답함을 막아보고자 함이지.
통칭 점을 보는 사람들 중 점쟁이가 하는 조언을 따르는 사람들에겐 정말 효과가 있기도 하다더라. 조언을 따르는 것은 어쨌든 내 처지를 개선시키는 '행동'일 수 있단 소리겠지.
점쟁이를 그냥 카운슬러로만 삼거나 내가 재수 없는 근원을 캐기 위한 도구로 삼아 신세한탄에서 그치면 늘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문제로 그에 너무 의지하여 휘둘리며 맹신으로 나아가기 십상이겠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저 받아들이는 것도 고민거리를 떼치는 거야. 운명이다, 조상 탓이다, 전생의 업이다 하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니 그냥 놔버리면 되는데중심을 잃고 거기에 너무 얽매여 버리면 허튼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지.
그러니까 미신도 나의 자세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단 말이야. 설명할 수 없지만 일어나는 자연의 현상과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저받아들이면(필요하면 개선의 행동을 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근심걱정은 불필요한 게 된다.
과학자이면서 유신론자들이 하는 소리가 있다지? "신이 없고서야 도저히 설명이 안된다." 카이스트 안의 유신론자 서클이 있는데 거기 가입한 엄마 지인의 사촌은 신의 존재를 굳게 믿는단다. 연구하면 할수록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영역은 신의 존재를 오히려 반증하는 거라나. 엄마는 신이란 인간의 창조물이라 생각하는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참 편한 소리란 생각을 했다. 현재의 지적 수준으로 밝혀낼 수 없는 모든 것에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면 그만이니까. 아직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는 우주, 그 까마득한 세계를 창조론으로 갖다 붙여버리면 오케이니 얼마나 편하니.
(사족을 붙이자면 무신론자로써 엄마가 신을 인정하는 범위는 신이 된 자의 가르침인 '사랑'을 새기고 본받아야만 하는 인간의 태도에 국한된 것이고 종교의 역할도 그 가르침의 실천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첨단의 과학에서조차 신을 빌리지 않고서는 안 되는 상황이 있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저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일 수 있다.
뭣이 중헌디!
그래.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오히려 우리의 능력으로 명확하게 정의 내리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극소수일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과학은 많이 밝혀냈다지만 인간의 뇌, 의식과 무의식, 우주 같은 분야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니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과학적이라고 미신을 꼭 배척할 필요는 더욱 없겠지. 마찬가지로 번듯한 경전이 없고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했더라도 예수나 알라나 부처보다 더 오래되고 아직도 전해지는 민간 신앙도 토속적 믿음들도 미신이라며 배척할 필요가 없다. 다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그 나름의 근거도 있으니까.(국가의 공인을 받음은 물론 전 세계에 뿌리내린 거대 종교들도 오늘날 그 성격은 두려움에 의탁하고 기복만을 비는 미신적 요소만이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징크스를 미신 취급해서 경원시할 필요도 없다. 유명 운동선수 중에서 징크스에 얽매이고도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들도 많아. 나름의 의식인거지.
아기이름을 태어난 날짜와 시로 정하고 결혼날 이삿날을 따로 받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4층을 F로 표시해 놓은 건물도 많고. 이런 것들이 다 징크스 극복의 의지가 아닐까.
미신을 분석한 기사 하나가 생각나는데 왜 유독 시간을 4:44를 많이 보냐는 거야. 나름의 근거로 설명을 한 게 2:34나, 12:46나 아무 숫자나 우리는 보는데 4:44는 우리의 의식에서 특별난-나쁜 쪽으로-숫자다 보니 뇌리에 많이 남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란 요지였다.
모든 징크스들과 미신들도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우리 의식의 속임수에 불과할 뿐, 더 좋으려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은 그저 삶의 윤활유가 되어주면 좋겠지. 적당히 하면 재미도 있고 말이야. 그러나 지나치니 항상 문제가 된다. 작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맹종으로 가버리면 답이 없어지지.
믿음에서 지나침을 필히 경계해야 한다. 사이비 교주 한 사람에게 성착취를 당한 수수 많은 여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요즘 한창 이슈다.
해당 종교에서 겨우 빠져나온 이의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대학시절 대학생중심으로 포교를 하던 그 교회에 빠지게 되었고 그 속에는 서울의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던 자신의 학벌이 뒤처질 정도로 소위 명문대생들이 즐비했고 거기에서 더욱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교에 다니는 엘리트들도 믿고 다니는 교회고 목사라니까.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것, 또는 스펙터클 한 것을 우리는 쉽게 믿는다. 현란한 말발에 번지르르한 허울에 속아 넘어가지.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가.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그 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중요한 것이 아닌 모든 것에 현혹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요즘 세상의 어떤 믿음은 조석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해. 특히 건강과 관련된 이슈들이 심하지. 건강기능식품회사와 쇼핑채널들과 TV에 등장하는 소위 '닥터테이너'라 불리는 의사들의 합작으로 꼭 먹어야 할 건강음식이 수시로 바뀌어 재바른 엄마들은 가족들에게 이걸 먹였다 저걸 먹였다 허둥대고 도대체 어떤 말을 믿어야 하나 혼란스러워한다.
온갖 미디어에서 온갖 것들을 떠들어대는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이 제대로 된 것이며 어떤 것을 믿고 행해야 할지 아리송하기만 하지.
이런 혼란 속에서 더 요란하게 떠벌리고 끈질기게 지속해서 각인시키는 것에 어느덧 마음이 옮아가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 어찌 보면 옳다는 믿음도 끈질긴 누군가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
하루에 이를 세 번 닦아야 한다는 당연한 믿음도 실은 미국의 치약회사의 광고의 결과물이고 하루에 만보를 걸어야 건강이 유지된다는 것도 일본의 어느 만보기제조회사의 광고의 결과물이며 물을 하루 2리터는 마셔야 한다는 것도 생수회사의 로비의 결과라니. 믿음은 누군가의 지속적인 주입만으로 대중에게 각인되는 것은 너무도 쉬워 보이지 않니. (반대로 어떤 믿음들은 너무도 쉽게 외면당한다. 칫솔질만 잘해도 치과 갈 필요 없다 해도 믿지 않고 비싼 치과시술에 돈 쓰는 쪽을 택하고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이 살찌지 않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믿음으로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것에 그래. 진실에 근접한 것은 늘 간단한 것인데 우리는 쉬운 것을 배척하고 늘 어떤 특별하고도 어려운 해결책을 기대하고 찾는 거야.)
우리가 회사들에게만 세뇌당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런 사례들은 너무 많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꼭 '국민의 뜻'이란 수식을 붙여가지고 밀어붙이는 정치인이며 별일 아닌 것을 지속적으로 떠들어대서 중차대한 일인 듯 만들어버리는 언론이며 반대진영을 사탄이라 칭하며 주님의 이름을 팔아 대는 정치색 진한 목사며 사이비 종교의 교주 못지않은 실력으로 선동해대고 있잖아.
(비정상적 행동을 일삼는, 지혜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저 권력의 정점도 그래서 슬쩍 걱정된다. 그 옆에 드리운 사이비의 그림자 때문에.)
그래서 어떤 것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남았다. 아무나 아무 말이나 다 해대는 이 아무 말 대잔치 속에서 너는 어떤 것을 믿을 것인가.
일단 믿지 않을 것.
치우치지 말란 소리야. 또한 누구나의 믿음도 그들의 권리로서 존중하란 소리다. 설사 너의 생각과 반대의 극단에 가 있어도 그저 듣고 인정해 주면 그뿐이다. 다양성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 더불어 너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해. 네 생각은 절대 옳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은 없어. 그 생각이 굳어지면 너 스스로가 너에게 갇히는 꼴이 된다. 항상 유연한 사고를 가지는 게, 개방적인 생각을 하는 게 네가 갇히지 않고 나아가는 유리한 길이며 유일한 길이다.
특정 종교나 사상, 정치적 이념에 깊이 치우치는 것은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항상 두루두루 보고 듣고 너 이외의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열린 눈과 귀를 가지고 살피고 경청해야 해. 그러려면 필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책 읽기. 엄마의 긴 이야기는 어쩌면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몰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지에서 오는 또는 막연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암과 무서움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이야. 미신에 종교에 사람에 기대지 않고 이 두려움을 헤쳐가는 도구는 지혜로움이 아니겠니.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지식을 많이 쌓아도 지혜가 없는 어리석음으로 미신에 빠지고 맹신에 빠져드는 거야.
매일 책만 붙들고 사는 학자들도 교수들도 사기당할 수 있고 미신에 빠질 수 있다. 거기 하나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그러니 엄마가 열린 눈과 귀를 가지고 다독을 하라 강권하는 거야.
이 세상의 리더라 할 수 있고 멘토라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정말 그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것이 독서의 중요성이다. '생각하는 힘'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독서이기 때문이지.
다양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생각과 판단력을깊고 넓게 이루고현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방법은 바로 책에 있다.
또한 독서는 비판의식을 기르는데 더없이 좋아. 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얼토당토않은 것을 걸러내고 옳은 것을 취사선택 할 수 있는 비판적 생각은, 옳은 말과 바른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뜬 눈은, 어떤 것이 믿을 만한 것이고 어떤 것이 본질적인 것인지, 어떤 것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지혜는 네가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쌓아간 책 읽기에서 얻을 수 있다.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냐. 처음에는 시시껄렁한 연애소설을 보거나 베스트셀러만을 탐독하거나 하는 것도 괜찮아. 읽다 보면 가닥이 잡히게 되어 있다. 깊고 풍부한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지. 혼란한 세상일수록 더욱 책 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루의 적은 시간을 투자해서 꼭 네 마음의 눈을 밝히거라.
믿음에서 책 읽기로, 이 엉뚱한 비약이 너에게 와닿니? 후후.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어쩌면 믿음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무엇을 믿고 믿지 않고. 신념이라면 신념일 수 있을 어떤 믿음들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몰라. 그 하나에 너무 빠지고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면 또 그럴 수 있는 (생각하는) 힘을독서로써 기를 수 있으면 어떠한 세상에서도 너는 잘해나갈 수 있지 않겠니.
네가 가진 지혜로 너 스스로에게 묻고 네 안에서 현명한 답을구하거라.
누구를, 어떤 것을 기둥으로 세우지 않고 너 자신을 중심에 세우면 미신이니 종교니 사상이니 정치적 이념이니 하는 부차적인 것들과, 세상의 다양한 믿음과 잘어울릴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