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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Aug 21. 2023

오직 마음이 짓는 것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서른 번째 편지



절기란 게 참 무섭다. 입추가 지나 태풍이 한바탕 지나가고 이제 처서가 가까워오니 아침저녁으로 와닿는 기운이, 영원할 것 같던 무더위와는 이제는 거리가 먼 듯 느껴지니 말이야.

세월 참 빠르다! 언제 이렇게! 계절의 변화가 피부로 느껴지면 자동적으로 뱉어지는 말대로, 그래, 어느새 변화는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젠 네가 좋아하는 물놀이도 막바지에 이르렀나 보다. 이번 주 주말에 계획된 가족들과의 물놀이는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스스로가 물놀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30대 중반에서야 안 엄마는 마지막 물놀이를 위해 마트에서 60% 세일하는 튜브를 장만해 놓고(물론 세일을 하지 않았으면 안 샀을) 그날을 벼르고 있단다. 하하!



한창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몇 주 전, 너의 아빠가 야심 차게 준비한 옆 도시로의 물놀이 원정이 완전 실패하는 바람에(아이들 전용 물놀이장으로, 물깊이는 어른 발목 조금 위로 밖에 안 됐고 앙증맞은 미끄럼틀이며 시설이 딱 네가 놀기 좋을 것처럼 생겼지만 미끄럼틀 위에 붙은, 물이 차면 자동으로 쏟아지는 물동이를 너는 그렇게 무서워했다!) 우리는 또 주섬주섬 범어사를 찾았지.


천년 고찰 범어사는 엄마가 참 좋아하는 절이다. 집에서 차로 넉넉히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고 금정산 한 자락에 소담하게 자리 한 그곳을 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져 문득문득 찾고 싶어 지는 엄마의 최애 장소 중의 하나야. 작년 가을의 범어사는, 대웅전 주변의 등산로에 환상적으로 물든 노랑의 빛들로 그야말로 굉장했었지.

십여 년 전쯤, 엄마의 일본인 동료작가 다나카짠이 그의 남자친구(지금은 남편)와 부산을 방문했을 때, 엄마는 왜 그들을 범어사에 데리고 갈 생각을 했을까. 내 마음 깊이 부산의 진짜 좋은 곳은 여기!라는 마음이 있었던 걸까, 어디 좋은 데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으로 생각해 낸 장소가, 지하철로 1호선 거의 끝까지 한참을 가고, 또 내려서도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지금이라면 승용차가 없인 손님을 차마 데려갈 엄두를 못 낼 그 깊은 산중으로 그 둘을 (승용차 없이) 데려갔다. 시내에 저녁 약속이 있었던 그들이 시간 맞춰 가기엔 심히 외곽지역이었던 그곳을 다나카짠의 연인 사이토상은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다.


그 범어사를 그 후로도 너의 아빠와 종종 찾았어. 집에 있기 싫고 어디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은데, 걸핏하면 가는 기장의 임랑, 그 주변 바다가 좀 지겨워지면 생각나는 데가 바로 범어사였어. 작년엔 네가 좀 커서 여름에 물놀이를 데려가도 괜찮겠다 싶어 찾은 데가 범어사 계곡이었다. 얕은 물에, 갈 때마다 잘 노는 너의 모습에 우리는 뿌듯해하며 올해도 폭염과 함께 당연한 듯 떠올린 장소가 그곳이었지.



그날도 예외 없이 무더웠고 일요일이었다(전날의 물놀이 원정은 말했듯, 실패했고). 우리는 김밥을 사들고 좀 늦은 걸음을 했는데 계곡 초입부터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에 정말로 아연했다! 어느 틈새 하나 놓치지 않고 그야말로 빽빽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들 틈으로 어찌어찌 작은 자리 나마 마련할 수 있었다.

물은 시원했고 너는 금세 장난에 빠져들었어. 단지 신경 쓰이는 건, 우리가 자리를 잡자마자 약 1미터 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노인들 무리 중 한 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너무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거였어.


티브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양 눈을 떼지 않던 그 할머니는 (60대나 많아봐야 70대 초반, 네 할머니 할아버지 또래의 분들이었다.) 부담스러워하는 내 눈치를 느꼈던지 발 담그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자신의 무리에 합류했다. 곧 무리 중의 한 할아버지가 그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문득 담배를 한 대 꺼내서 피웠다. 헉! 실화냐! 그 담배연기에 질색하는 것은 나뿐인 듯 해 그냥 참고 있었지. 휴, 이제 다 태웠나, 싶은 찰나, 실화 맞냐!! 두 대째 꺼내서 또 불을 붙이는 거야. 화, 여기선 딱 봐도 금연일 것 같은데, 항의해야 하나, 3초 고민하고 짐짓 외면하는 나를 눈치챈 너의 아빠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

말했지만 우리는 서로가 불과 1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상대의 표정을 잘 읽을 수 있는 거리지. 나의 표정에 '불쾌'를 읽었던지(엄마가 담배를 피우는 그를 넌지시 보긴 했다.) 그래서 그가 불쾌했던지 이제는 카악~ 하고 가래를 돋우더니 그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 퉤~하고 뱉었다. 엄마야! 성에 차지 않았던지 연달아 서너 번을 연속으로 카악~ 돋우고, 퉤퉤퉤 뱉고. 그러곤 나를 보더구나. 어떠냐? 하고. 


가래침이 뱅글뱅글 돌다 흘러내려오는 그 1미터 아래엔 네가 천진난만 놀고 있었다. 계곡이 쩌렁 울리게(오번가) 가래 돋우는 소리에 네 아빠도 그를 흘깃거렸다. 내가 또 신경 쓰였을 테지. 아휴 불쾌해. 어쨌든 불쾌한 건 사실이었어. 근데 뭐 어쩌겠어, 또 모른척했다. (모른 척하는 내가) 만족했는지 그는 한창 고스톱 판이 벌어진 그의 일행무리에 섞였다. 잠깐 평온했나? 너는 여전히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있고(그래봐야 컵으로 물을 퍼담고 쏟거나 돌멩이 던지는 것) 이제 슬슬 돌아갈까, 싶은데 고스톱놀이가 시들했는지 그 무리 중의 할머니 1이 다가와 물에 발을 담갔다. 연이어 우리를 티브이 보듯 하던 할머니 2도 같이 착석을 하더니 사이좋게 발의 각질을 밀기 시작했지. 아이고야~


그래, 일 미터 밑의 너는 그 물을 길어서 너의 아빠에게 아빠~ 먹어봐~ 하고 권하는 놀이에 푹 빠져있고 빙충맞은 너의 아빠는(정말로 빙충맞아 보였다!) 그 물을 자신의 뾰족 튀어나온 입으로 들이부으며 아이고 맛있네~ 했지. 그 소리에 놀란 할머니 1은 (저 빙충이가 정말 먹나, 싶었던지,)퍼뜩 너의 아빠를 돌아봤고.

아이고, 이쯤 되니 엄마는 그만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는데 네가 엄마도 먹어봐~ 하면서 컵을 내밀길래 아이, 더러워라! 하고 말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너의 아빠의 분노의 물세례를 받았지.

한참만에 각질 제거가 끝났던지 할머니 1이 이제는 물 한가운데 서서 또 티브이(우리말이다.) 시청을 하더구나. 이제는 말까지 보태가며. 한참을 서서 그러고 있는 그녀 위로 그 무리 중의 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1미터 위의 대나무밭으로 발을 느리게 옮겼다. (그래, 엄마도 티브이 보고 있었다.) 훅 끼쳐오는 김치냄새가 이어질 행동의 전조인 듯, 그는 대나무밭의 초입에 김치통을 확 엎었다. 그러니까 거기 음식물쓰레기를 버렸다. 와~ 이제는 더 못 있겠다 싶어진 엄마는 드르릉드르릉하고만 있다 확 발동 걸린 경운기처럼 두 사람을 재촉해 거길 빠져나왔지.

계곡 아래쪽에 고성이 오가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싸웠다고 너의 아빠가 전해줬다. 엄마는 속으로 생각했지. 분명히 누가 담배를 피웠거나, 가래를 뱉었거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렸겠지, 흥!


차를 타자마자 거의 동시에 잠이 든 너를 확인하고 엄마도 졸음에 겨워있는데, 오늘 일 때문인지 좀 오래전에 본 기사하나가 떠올랐어. '염소(Cl)는 죄가 없다' 정도의 기사제목이었는데, 우리가 수영장을 다니며 앓는 온갖 피부병의 원인은 우리가 알던 바와 달리 소독약, 즉 염소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그 원인은 사람들이 물속에서 하도 싼 오줌 때문이라는 거였어. 우리는 그 물에 수영하고 몸의 온갖 구멍으로 그 물을 넣고 빼면서 피부병에도 걸린다는 건데 애꿎은 염소의 있지도 않은 독성을 탓한다는 거지.

그게 오줌물인 줄 알면 사람들이 자청해서 거길 들어가겠니?

졸음에 꾸벅꾸벅하면서도 엄마는 자연스레 원효대사와 해골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날의 원효는 도를 얻고자 당나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하룻밤 묵어간 동굴 안에서 한밤중 심한 갈증을 느낀 그는 머리맡에 마침 놓인 물을 맛있게 마시고 다시 단잠에 들었다. 다음 날, 그것이 해골 안에 고인 썩은 물임을 안 그는 구토하며 괴로워했지. 그때 그는 깨달았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 일이구나! 모르고 먹었을 땐 그리도 달던 물이 썩은 물인 것을 알고 나자 구역질이 치밀었던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거야. 도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마음'에 있다는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구도의 길을 접고 신라로 돌아왔지. 이게 1500년을 내려오는 그 유명한 원효대사의 해골물, '일체유심조'의 설화야.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그다음 주, 주말이 되자 우리는 또 범어사 계곡을 찾았고 시원한 물에 물이며 음료를 담그는 나를 보더니 너의 아빠가 계곡물에 절대 수박은 담그면 안 된다고 말하더구나. 인터넷 뉴스에 난 기사를 보여주며 물이 더러우니 먹을 것을 담그는 행위는 하면 안 된다고 했어. 뭐, 어차피 있지도 않은 수박, 캔이나 페트를 담그는데 상관있을까, 싶었는데 나중엔 계곡물보다는 아이스박에 넣어놓는 편이 훨씬 시원하다는 것을(또 위생적이고) 마실 때 깨달았다.

요는, 기사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생각해 보면, 계곡물이 절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야. 사람들은 신발을 신은 채 물에 들어가고 또 옷을 입은 채 들어간다. 그 신발로 무엇을 디뎠을지, 그 옷 안의 위생상태가 어떨지 아무도 모르지. (물 안에서 무슨 행위를 하는지도 모르고.) 엄마도 그랬듯, 준비해 온 갖은 물건들을 담그고 가볍게 씻어내고 한다. 그 위생상태를 수치화해서 알려준대도 들어갈 무모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는 몰라서 그냥 넘어가지는 것들이 많고도 많다.

2006년, 베이징 올림픽 전의 중국 베이징을 찾았을 때, 한참 도시 정화사업 중이던 뒷골목의 식당 음식들을 너무도 맛있어하는 나를 보고 가이드를 했던 친구가 주방을 본다면 네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보고는 못 먹으니 안 보고 먹는다,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의 인증을 받고 명인이란 호칭까지 얻은 사람의 공장에서 제조한 김치도 내부자의 고발로 썩은 김치라 밝혀지고 뉴스에 나오는 불량 업체들이 생산한 음식이며 제품들을 우리는 모르고 소비하기도 하잖아. (물론 이런 눈속임에 일체유심조를 활용하란 말은 절대 아님을 알지?)

눈에 보여 내 마음에 불쾌감이 이는 행위도 보이니 문제가 되는 거지 내 눈밖에서의 어떤 행위도 내가 모르는 한 어떤 불쾌감도 느끼지 못한다. 수영장물에 들어가는 것도, 계곡물의 위생상태를 눈감는 것도, 허름한 식당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도 다 상태가 좋지 않을 거란 추측은 있어도 그래도 몸을 담글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는가 봐. (모르는 게 약인 채로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유학길을 떠났어도 그는 일체유심조의 경지에 통달할 수 있었을까?)



예전에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일화가 있다. 다산이 아침에 필요해서 낫을 찾으니 그것이 항상 놔두는 자리에도 없고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대. 그때 지나가는 옆집 아이가 자신의 낫을 훔쳐간 도둑으로 의심이 됐지. 그의 눈엔 아이의 눈도, 코도, 입도, 표정도 영락없는 도둑놈의 상호였대. 그 아이를 의심하자 괴로운 마음이 한정 없이 일었다. 어떻게 저것이 실토하게 하나, 어떻게 저것의 버릇을 고쳐놓나.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다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자신의 낫을 발견한 거야. 꼭 필요한 그것을 찾으니 너무 기뻤고, 그때 지나가는 옆집아이를 보니 그 아이의 얼굴 어느 한 곳도 도둑놈처럼 보이는 곳이 없었단다.


다산의 이 일화가 원효의 일체유심조에 꼭 들어맞지 않니? 옆집 아이는 어제도 오늘도 그저 꼭 같은 아이에 불과했다. 그 아이를 두고 어제는 지옥을 오늘은 천당을 오간 것은 다산 자신, 그의 마음이었던 거지. 의심하는 마음이 아이를 도둑의 상호가 되게 했고 의심이 풀린 미안한 마음에 아이는 어진 상호가 됐다.


 

이 의미심장한 깨달음으로 우리는 마음의 평화에 더 가까울 수 있을 거야. 미워하고 싫어하고 불쾌하고 또 좋아하는 이런 마음들이 다 우리 속에 일어나 스스로를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할 뿐, 해골 안의 물은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거기 있었고 다산의 이웃아이는 어제도 오늘도 그냥 그 아이일 뿐이었지. 계곡물에 가래침을 뱉어도 그것을 안 나는 괴로웠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너는 평온했다.


모르고 평온하게 받아들이던 일들이 진위를 알았다고 해서 그 자체의 성격이 바뀌었나, 아니지. 그 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달라진 것뿐이다. 괴로움으로, 혹은 기쁨으로.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상태'도 그 본질은 어떠한 특성도 없다. 다만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가라앉는 감정의 출렁거림이 있을 뿐. 그 상태가 특성을 가질 때는 오직 내 마음이란 옷을 입었을 때뿐이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로 와 꽃이 되는 것처럼. 후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수 없이 일어나는 미움과 갈등, 배신감, 또 이해심과 미안함, 나의 마음상태를 뒤집었다 '알고보니 이래서' 또 뒤집는 수많은 감정의 변주들을 그저 '해골물'이라고 인식하면 거기에 좀 여여해질 실마리가 있을 것 같지 않니?


더불어, 모든 것이 마음먹는 데 따라 달렸다면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주변의 일들을 대하는 게 유리한 것 아닐까. 또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 진리라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자기 스스로,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인간은 참 자유인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에, 너에게 불리해 보이는 일들에, 꼴 보기 싫은 인간들에, 불평하는 마음에서 그저 수용하는 자세로 옮겨가면, 그러니까 중립적인 마음가짐으로 너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저 그 상태를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으면 어떨까. 내 마음이 휩쓸려가지 않아 알아도 몰랐을 때처럼 평온할 수 있는 것, 그래서 행복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일체유심조의 참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 한 번 올바로 바꾸면 오직 행복한 일들만 있다는 것을 엄마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주말에 찾을 결코 위생적이지 않을 그 시원한 계곡물에 어차피 지금껏 논대로 그렇게 재미있게 논다면 물의 수질을 알리는 인터넷 기사도 또 주변의 어떠한 행동들도 우리가 즐겁게 한 때를 보내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을 거야.





엄마는 언제나 너에게 성장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엄마는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행복은 또 자유로운 삶은 저 무지개 너머에 있어 도저히 닿을 수 없다는 착각을 할까 봐 엄마 된 자로서의 노파심에, 행복과 자유는 그 어디도 아닌 바로 네 안에 있다는 말을 여러 변주로 하고 있는 거야.

엄마의 말을 이해한다면 믿고 일단 한 걸음부터 내디뎌 보는거야. 당장에 저 멀리 한 번에 도약하려면 그것은 불가능이지만 한 걸음씩 내디디면 언젠간 그 언저리에 다가가 있는 거지.


'삶은 성장'이란 소소하고 야무진, 그래서 귀여운 느낌의 모토 motto를 동력 삼아 대단히 힘들 것도 없이 꼭 한 걸음씩만 내딛는 게 어떻겠니. 거창한 성장이 아니라 너의 몸이 조금씩 자라나듯 너의 마음도 조금씩 자라나게 해주는거지. 어느 순간, 네 몸의 성장이 멈출 때, 계속 성장하는 너의 마음이 너를 잘 보살펴 주도록. 

걱정 마. 자꾸 넘어지면 자꾸 일어나면 되니까. 넘어진 김에 쉬어도 가고.

그러다 어느 틈엔가 동굴쯤에 머물러가다 무심결에 득도를 하는 행운을 얻을지도 모르잖아? 인생은 이렇게 여기저기 예기치 않은 보너스가 숨겨져 있단다. 너는 지금도 보물찾기 놀이를 좋아하니까 네가 걸어갈 여정 곳곳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내며 가는 걸음걸음 재미나게  수 있을 거야. 


떡하니 네 손에 쥐어진 그것을 보물로 받아들일지, 말지는 알지? 일체유심조란걸!





AUG. 2023. 엄마의 서른 번째 편지.


아빠가 야심차게 준비한 물놀이장을 무서워한 이도. 엄마가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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