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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Aug 09. 2023

투명 망토를 입은 사나이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스무아홉 번째 편지



아, 이도야. 엄마가 너에게 남겨주고자 시작한 이 글쓰기가, 이 편지가 불과 열 달여 만에 하기 싫은 과제가 된 것일까. 스스로 정한 일주일에 한 통이 어느 시점엔 -개인전 준비를 핑계로-이 주일에 한 번이 되었다가 그 이 주를 지난 지금, 날짜는 자꾸만 가는데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들을 손으로 박아 넣는 작업이 왜 이렇게도 고된지,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의 만성 레퍼토리를 읊다가 이제야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엄마는 심히 자괴감을 느낀다. 내가 이러려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나...(따옴표 안에서 변주가 가능한, 너는 모르는 유머다. 후후.)


엄마가 스스로 시작해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이 넘은 등산도 요즘 너어무 가기가 싫다. 더위, 아니 폭염 때문이라고? 작년에도 호들갑스러운 폭염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기 싫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뭔가, 작은 도약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정하여 행하는 것들도 그래서 매일 하던 것들도 어쩌면 이렇게도 몸에 익지를 않는지. 잘해오다가 이렇게 갑자기, 불현듯 다 하기 싫어질 때를 맞닥뜨리면 엄마는 꽤나 황망해진다. 괜히 나의 의지력을 의심하고 너에게 강조한, 이럴 때 발휘되어야 할 가치(ex인내심)들을 생각하면서 켕기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구나. (어쩐지 너도 요즘 부쩍, 오늘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 묻고 그렇다 하면 아주 실망하며 때로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쓴다. 반대로 아니라고 하면 아주 좋아하고. 휴.) 그래. 그러나 엄마는(이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 꾸역이란 표현에 걸맞은 더딘 걸음을 그래도 한 발짝씩 내딛고 있다. 모두 그럴 거야. 더운 날 에어컨도 없는 현장으로 일하러 가야 하는 (아무 보람 없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한다는)너의 아빠도, 오늘 때려치울까 내일 때려치울까, 품 안에 사표를 넣어 다니며 매일을 하기 싫음의 극단을 달리는 직장인들도, 못지않게 생업인들도. 이다지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하는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는 내일의 너를 위해 오늘의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이제, 투명 망토를 입은 한 사나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네가 있기 전의 엄마는 영화를 많이 봤다.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못해도 하루에 한 편은 꼭 봤고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날도 많았어. 한 때 영화에 푹 빠져 사는 날들이 있었지.

나의 감각과 의식을 거쳐 간 수수 많은 영화들 중 엄마의 인생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쇼생크 탈출'. 내가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으니 시시해하는 영화광도 있었지만 이 영화가 인생영화인 이유는 분명하다. 엄마의 이상향, 가고자 하는 길,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상을 쇼생크 탈출의 히어로, '앤디 듀프레인'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날이었어. 당시 친한 수연이란 친구의 집에 놀러 갔는데 수연이가 미리 빌려놓은 그 비디오를 여러 명이서 같이 봤지. 보는 내내 별 잡담도 없이 집중해서 봤던 기억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도 보고 대학교 때도 보고 한 영화채널에서 주야장천 틀어주는 바람에 또 계속 보고.(엄마의 인생작이 될 수 있도록 이 좋은 영화를 계속해서 노출해 준 그 채널에 감사해야지.) 그런데 볼 때마다 빠져 보게 되는, 정말이지 마성의 영화랄까.


어느 날, 또 우연으로 그 영화채널의 쇼생크 탈출을 보는데 문득, '레드'의 내레이션 대사가 엄마의 가슴을 찔러왔다. 죄수들 사이를 약간은 어슬렁거리는 굼뜬 걸음으로 느릿느릿 걷고 있는 '앤디'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레드의 감상은, 그런 앤디의 모습이 이 쇼생크 안에서 마치 '자신을 보호해 주는 투명망토를 걸치고 있는 듯' 보인다 였어. 앤디를 향한 그 묘사는 그날부터 묘하게 엄마의 가슴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되었지. 앤디의 어떤 점이 노련한 죄수의 눈에 설게 비쳤을까.



'앤디 듀프레인'은 잘 나가는 은행원으로 자신의 부인과 그녀의 정부를 살해한 누명을 쓰고 명 높은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다. 16살에 사람을 죽인 죄로 수감되어 초로의 나이가 된 '레드'는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죄수로 쇼생크의 터줏대감이다. 그의 눈에 새로 온 앤디의 샌님 같은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고, 앤디를 포함한 새로 입소한 죄수들 중 '첫날밤에 누가 가장 먼저 울음을 터트리나'의 기존 죄수들 간의 내기에서 주저 없이 앤디를 선택하지. 그러나 레드의 예상은 빗나갔고, 어느 날, 물건을 구해줄 수 있겠느냐 먼저 말을 걸어오는 앤디에게 묘한 호기심과 끌림이 생긴다.

여전히 쇼생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앤디, 그는 우연히 한 교도관의 세금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신임을 얻고 교도관은 물론 교도소장의 회계까지 맡게 되지. 그러던 중 새로 온 젊은 죄수로부터 앤디의 부인과 정부를 살해한 진짜 살인범의 존재를 들어 알게 된다. 적극적으로 구명기회를 얻으려던 앤디에게 돌아온 건 젊은 제보자의 죽음과 긴 독방신세, 그리고 깨닫게 되는 앤디. 교도관들에게 자신은 그저 재주 좋은 애완견에 불과하다는 것, 진실이야 어떻든 그런 유용한 애완견을 그들이 절대 풀어주지 않을 것이란 것. 앤디는 마침내 스스로의 '구원'을 선택한다.


앤디는 사실 처음부터 보통의 인물은 아니었어.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지만 교도관들조차 그의 편에 서서 그를 괴롭히던 '보그스'불구로 만들어 다른 데로 쫓아냈고, 앤디의 꾸준한 요청으로 마침내 주정부로부터 받게 된 기증된 도서들이 도착했을 땐 그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지.

교도관이 이러할진대 레드를 포함만 동료 수감자들은 그를 좋아할 밖에. 젊은 재소자(앤디 사건의 진범을 증언했다 죽임을 당하는)의 검정고시 선생이 되어주고 재소자를 위한 도서관 만들기에 몇 년간 매주 두통씩 편지 쓰는 방식으로 공을 들이고 이뤄낸다.(여기서 앤디의 반응이 걸작이다. 이제 편지를 그만 써도 되겠단 교도관의 말에 "이제부턴 일주일에 세 통씩 써야겠어요!") 기증받은 책들 사이에서 모차르트의 엘피판을 발견한 앤디는 교도관이 볼 일 보러 간 틈을 타 특유의 느린 동작으로 축음기에 판을 올리고, 그 아름다움을 모든 재소자들이 듣게끔 바깥 확성기의 스위치를 켠다. 노동을 하던 죄수자들 사이사이로 유연히 흐르는 피가로의 웨딩, 레드는 후에 그때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지. 죄수들에게 잠깐동안의 자유와 희망과 황홀경을 준 앤디는 그 죄로 독방에 갇히지만, 독방에서 풀려나 초췌해진 그의 몰골에 마에스트로 양반 나오셨구먼! 하고 놀리는 동료들의 눈빛과 몸짓엔 그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지.


앤디가 이 모든 것을 단지 동료들을 위해 했을까? 그렇게 그는 헌신적이고 이타적이며 선의에 찬 인간일까. 아니, 그는 지독히 주체적인 인간이었을 뿐이야. 자신의 환경에서, 그것도 억울하게 들어온 악명 높은 교도소라는 곳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렇게 되도록 한 발짝씩 내딛는 사람이었던 거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운명을 저주하거나 신세를 한탄하거나 상대를 탓하지 않고 일단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고 그 속에서 그래도 내 행위로 변화와 개선 가능한 것들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인간. 지옥에 떨어진들 그는 그곳에서 제 역할을 찾았을 거야. 이런 인간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최악의 일과 가장 처참한 순간과 지옥과 같은 환경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에게는 그저 묵묵히 이겨낼 자신의 인생 한 자락에 불과할 텐데.

스스로를 보호하는 투명망토를 걸친 이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단단한 자유의 결계를 쳐 어떠한 세속적 고통도 차단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는 자유의 빛으로 주변을 밝게 물들인다. 그래서 후에, 그가  없는 교도소 안에서 남은 동료들끼리 그가 이뤄 낸 놀라운 일들을 회상하며 그들끼리 즐거워하고 또 그를 그리워하지. 그가 남기고 간 잔광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어쩌면 전설로 남을지도 모르는 채.


그의 덕에 얻은 검정고시 합격증도, 그의 덕에 아끼게 된 회계 수수료도, 그의 덕에 얻은 도서관도 여가도, 또 지붕의 타르작업 후 그의 덕으로 마시게 된 -교도소 안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맥주도, 주변인들이 그를 좋아하게 된 많은 일들은 앤디 스스로가 거머쥔 자유에 비하면 그저 떨어진 떡고물같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동료들이 맥주를 궤짝으로 놓고 간수들과 함께 마시며 기괴한 동지애와 잠깐의 평화와 자유를 느끼게끔 해놓고 그가 조용히 짓는 미소에서(그는 단 한 모금의 맥주도 마시지 않았다!), 확성기로 피가로의 웨딩을 틀어주고 교도관의 협박에도 오히려 볼륨을 높이며 (이 행위로 본인이 져야 할 대가를 알고도 기꺼이, 모든 이에게 황홀한 해방감을 선사하고 긴 형벌(독방수감)을 받아들인다.)교도소장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눕힌 그의 만족한 웃음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온전한 떡을 맛있게 먹은 이는 바로 앤디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 할 거야.



자유가 없는 그곳에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하고 제 역할을 만들어 나름 잘 살아가는, 말하자면 구속에 '적응'한 부류 또한 있다. 앤디를 포함한 죄수들을 유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특유의 성적취향을 앞세운 보그스 같은 인물도 있고 못 구하는 물건이 없어서 죄수들 사이에 절대적 위치를 확보한 레드 같은 인물도 있다. 어릴 때 좀도둑질로 들어와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 감옥 밖이 곧 죽음인, 그래서 가석방이 됐을 때 계속 수감되고 싶어 동료의 목을 칼로 찌르려 한, '자유'에 극도의 공포감을 보인 '브룩스' 같은 인물도 있지. 브룩스는 결국 가석방되고서도 사회에 부적응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어. BROOKS WAS HERE. 너무 오래 접혀있어 굳어진 날개를 억지로도 펼 수 없어 날아갈 수 없었던 그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의 속박을, 아이러니한 현실을 못 견디고,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단 사실을 낯선 여관방 구석에 새기곤 어쩌면 자유 비행이 가능할지 모를 저세상으로의 길을 선택했지.

브룩스의 소식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동료 수감자들을 향해 레드는 말한다. '자그마치 50년이야!', 그는 50년을 감옥 안에서만 살았고 감옥에 길들여졌다, 그 안에서는 제법 똑똑한 축에 들고 대체될 수 없는 그만의 역할도 분명하게 있지만 나가서는 그저 초라한 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길들여진 삶의 진정한 무서움이 바로 브룩스의 삶에 있음을 알고 섬뜩해진 레드였을 거야.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모르고 길들여진 동물들은 스스로는 야생성을 회복하지 못한다. 길들여진 개인 재롱이는 풀어주니 망부석이 되어 주인을 기다렸지. 인간을 길들이는 범죄자들이 그래서 위험하다. 나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원래 있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속박인 줄도 모르거나 아니면 막연히 알아도 벗어난 세상에 대한,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동성에 철저히 '적응'을 하고 만다. 자유의 날개를 한 번이라도 펼치지 못하고 저무는 생이 얼마나 많을까. 돈에 길들여져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익숙함에 길들여져 도전을 기피하고, 안락함에 길들여져 불편함을 못 견디고, 편리함에 길들여져 낭비하고 환경파괴를, 자멸을 초래한다. 길들여진 습관과 행동과 태도와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을 때까지 살던 대로 살지. 브룩스는 겁쟁이가 아니라 우리 대다수의 평범한 모습일 뿐이야.


앤디도 그 속에서 나름의 위치를 확보하고 (책을 정리하게 하고 감시 없이 앤디를 혼자 두고 화장실을 가는 교도관을 보면 그에 대한 어쩌면 비상식적인 신뢰가 보인다.) 심지어는 소장의 개인 회계사로서 비호를 받으며 그 속에서 제법 안정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는 결단코 길들여지는 삶을 택하지 않았다. 감히 자유인을 어쩌지 못하는 법, 죄인이 따로 있음이 명백해진 이상, 타인의 손으로는 절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함을 인지한 이상, 그 완전무결한 자유인은 누군가 씌워놓은 속박에서 스스로 벗어나리라 작정한 거야. 인내심을 발휘하여 조용히 치밀하게 계획을 실현시켜 나갔다. 결심의 날, 낡아빠진 본인의 작업화 대신 번쩍번쩍 닦은 소장의 구두를 신고 태연히 자신의 감방을 향해, 결전의 장소로 걸어가는 앤디. 그 정도의 일탈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사람들의 안일한 일상을 비웃듯 가벼이 속이는 데 성공하며 자유인의 대범한 탈출시도는 비로소 시작된다.



그래서 앤디는 탈출에 성공했냐고?

레드의 얘기를 먼저 해볼까? 레드는 가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지난 시간, 몇 번의 가석방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한 레드는 일련의 사건들로 초월하거나 초연해졌나 봐. 까짓 심사위원들의 눈치 보지 않고 본인이 교화된 것 같냔 질문에 마음속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거칠게 토해내 버려. 오히려 이 솔직함이 감동으로 먹혀들어 교도소 문을 나오게  레드의 심정은 그러나 복잡했다. 그도 브룩스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처지로 브룩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지. 속박된 자유, 그는 브룩스의 심정으로 그를 따라갈 궁리를 하고 있는 초라한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단지 앤디와의 어떤 약속만이 걸렸던 그는 우선 앤디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기로 결심한다. 레드의 날개는 아직 브룩스만큼 꽁꽁 굳진 않았던지, 가석방 규칙을 어기고 버스를 타고 떠나는 그는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흥분한 자신을 발견한다. SO WAS RED. 여관방 브룩스의 것 아래 새긴 흔적은 진짜 자유로 향해 가기 위한 가짜 자유에 종말을 고한 유언이었던 셈이야.


꿈에서처럼 파랗길 희망한 태평양 어느 섬에서 앤디와 레드는 재회한다. 카메라가 멀리서 잡은 그들의 포옹은 아마도 모래사장의 모래보다 뜨거웠을 거야. 자유를 위한 긴긴 세월, 지난한 여정을 오롯이 견디고 "오욕의 긴 터널을 벗어나" 마침내 스스로 쟁취한 자유는, 앤디에게 그것은 분명 탈출이 아닌, 구원임을 끝없이 광활한 태평양의 풍경이 대변한다. (쇼생크 탈출의 원제는 The Shawshank Redemption. Redemption의 의미는 구원에 가깝다.) 



그래, 앤디는 허구의 인물이다. 동시에 실존하기도 하지. 인간이 창조하는 모든 에피소드는 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을 수밖에 없다. AI가 만들어 낸 창작물들도 그 정보제공의 원천이 인간의 역사라면 마찬가지지 않겠니? 그러니 요는,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서 이 허구의 인물에게 이토록 매료될 수밖에 없단 거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노예 같은 삶 속에서도 빛나는 그 주체성을, 자유인의 자질을 우리가 배워 거칠 것 없이 살 순 없을까.

우스갯소리로 노예 같은 삶을 산다 하지. 웃기지 않는 우스갯소리 아니니. 삶에 치여 죽지 못해 사는 인간이 허다한 이 세상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란 식의 전환은 오히려 분노만을 조장했지. 그러나 피할 수 없으니 즐기는 것이, -이 표현이 걸린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그 상황을 내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사실은 주인 된 삶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세속의 돈과 명예와 지위가 하루아침에 박탈되고 온갖 모욕과 감시와 형벌만이 가득한 세상을 덤덤히 수용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 피할 수 없으면 일단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것, 내가 개선할 수 있는 것들과 그 기회를 포착해서 용기 있게 또 진심으로 시도하는 것, 또 결과를 기꺼이 책임지는 것, 앤디가 거친 이런 과정에서 상황이 서서히 내 편으로 돌아서는 거야. 지난한 일일 테지. 그러나 우리 안에도 앤디의 그런 특성이 분명 있을 거야. 외부의 어떠한 상황에 관계없이 자기 안에서 해결 못 할 일이 없음을 알게 되면 비로소, 어디를 가나 자신을 보호할 투명망토를 우리 또한 쓰게 되는 거다.


모든 것을 혼자 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방안을 찾되, 제삼자로부터의 해결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자유인의 조건이다. 조건을 알고 주변을 잘 활용하는 것은 또한 능력에 속한다. 폐가 될까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거야. 적절할 때 적절한 도움을 얻는 것은 현명한 거다. 앤디가 탈출을 위한 구멍을 뚫었을 때 그것을 가릴 커다란 미녀포스터들은 레드의 도움이 없었으면 구하지 못했을 테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완벽하게 주체성을 획득할 수 없겠지. 어느 정도는 노예로서 또 자의와는 다르게 또 꾸역꾸역 그렇게 살아가는 날도 있다. 그래서 자괴감도 들고 비참하고 또 회의감에 몸서리칠 때, 있다.

괜찮아, 그래. 그러면서 방향을 올바르게 찾아가는 거야. 삶의 지침이 확실하다면 옆길로 새도 도로 빠져나오면 그뿐이다. 알지?

기본은 그러니까 매 순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하고 그것을 책임지는 자세로 살도록 습관을 들이는 거야. 누구 때문에 어떤 것 때문에, 외부의 환경의 남의 탓으로, 내 삶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휘둘리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라. 무엇 때문에 가 되는 순간 너는 그 무엇에 휘둘리는 노예가 된다.




참 신비롭지 않니? 자신을 보호해 주는 투명망토, 그것의 존재가.


이 세상의 노예들은 감히 어쩌지 못하는 자유인의 증거, 세상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 자유인의 자질을 지닌 자만이 느끼는 꼭 마법과 같은 그것을 평범한 우리가 추구하기엔 버거운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한낱 범부임을 아는 엄마는 꿈은 클수록 좋다는 말을 야무지게 하면서 어서 마무리 지으련다.

좋아하는 영화이야기를 신나게 쓰다 보니 편지가 너무 길어졌나 보다. 너는 세상의 어떤 것을 좋아하는 아이일지, 문득 궁금해지는구나. 사는 게 힘들 땐 좋아하는 한 가지로 위안을 얻으렴. 아름답게 펄럭일 너의 투명망토가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하다.





AUG. 2023. 엄마의 스무아홉 번째 편지.


언젠가 투명 망토를 걸칠 이도. 엄마가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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