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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Jul 19. 2023

'열심히'의 함정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스무여덟 번째 편지



날씨 때문인가. 한정 없이 처지기만 하는 몸을 일으키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 후드득 떨어질지 모를 비핑계로 오늘 산타는 것도 째버리고 너를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한없이 무거운 몸을 소파에 묻어뒀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는지, 깨서보니 한 시간 반이 훅 지나 정오가 가까워 있었다. 아, 오늘은 한 게 없는데... 언젠가부터 그냥 보내버리는 시간이 견딜 수 없어진 엄마는 가뜩이나 원인 모르게 아침부터 가라앉았던 마음이 더 무겁기만 하다. 엄마는 무엇이든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게 된 걸까, 쪼개 써도 야속하게 빨리만 가는 시간인데 허투루 어영부영 보내버리는 가장 젊은 날의 일분일초가 영 께름칙하게만 다가온다.


엊그제 엄마는 만 4년 만의 개인전을 오픈하고 이제 한숨을 좀 돌렸다. 여유 있게 준비한다고 했지만 늘 막바지엔 좀 촉박하게 돌아갔고 그 와중에 전시 후의 여름을 어떻게 보낼까 야무지게 계획하며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다, 알아볼 것, 준비할 것, 공부할 것을 머릿속에 그려놓았지. 까먹을까 불안해서 메모도 해두었고. 알찬 하반기의 시작을 고대했으나 글쎄, 영 출발이 시원찮다. 해놓고 난 전시도 늘 그렇지만 해놓고 보면 이게 최선이었을까 좀 더 잘할 수 없었을까, 아쉬움과 내가 정말로 열심히 했나, 의심과 회의가 버릇처럼 들곤 한다.


며칠 전, 잠깐, TV에 나온 김연아선수의 인터뷰를 보니, 그녀는 은퇴경기를 은메달로 갈무리했을 때, 조금의 아쉬움이나 미련 없이 오로지 개운한 마음만이 들었다고 했다. 역시 사람들이 강철멘털로 칭송하는 특유의 특출 난 내공이 느껴졌달까,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온 이는 마지막을 대하는 자세도 그저 똑같이 성실하게 살아 낸 삶의 하루로 대할 뿐 거기에-까짓 메달색깔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뭐랄까, 주체적 삶을 체득한 이의 덤덤함이 묵직하게 느껴졌달까... 엄마는 아무래도 스스로 판단하기에 준비 기간 동안 매일을 최선을 다 하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그러나 아직도 헷갈릴 때가 있다. 얼마 큼이 최선을 다하는 것일까.




엄마는 최근에 '열심히'의 의미를 돌아보는 몇 번의 계기를 갖게 되었어. 당연하게 쓰고 들어오던 '열심'이란 단어가 문득 아주 귀에 설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어느 날 뉴스를 틀어놓고 씻고 나온 너를 닦이고 있는데 어떤 음성이 엄마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데 아마 20세 이하 축구대표팀 중 한 명이었던듯하다. 어린선수가 이제까지의 선배들의 대물림대로 국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경기에 임하려는구나, 그런데 왠지 불편했다. 늘 실력보다 나은 결과를 원하는, 우리가 축구를 대하는 '특별함'이 저 선수를 저리도 비장하게 만들었음이. 경기 잘하고 와서도 공항에서 죄진 사람들처럼 고개 못 드는 특정 종목 선수들이 오버랩됐어. 죽을 각오로 열심히 했어도 물론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상대가 실력에서 더 뛰어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편파판정이나 그 상황의 운에 따라서 얼마든지 결과는 갈릴 수 있지. 중요한 것은 운동선수로서 이런 큰 대회에 참가했고 대회를 위해 갈고닦았고 또 경기에서 잘 뛰었다면 그걸로 됐다는 것이다. 결과까지 좋아야 한다는 건 -더군다나 어떠한 사명감으로- 내 컨트롤 밖의 문제, 결국 욕심일 수 있어. 그걸 선수들이나 지켜보는 우리들도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분위기는 지난 몇 번의 올림픽부터 많이 퍼져있다.


또 어느 날, 휴대폰으로 우연히 한 영상을 보게 됐는데, 한 개그우먼이 특정 발언으로 계속해서 구설수에 오르고 욕을 먹는데 해명도 통하지 않자 울면서 힘든 심정을 고백한 모양이더라고. 그때 듣고 있던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그녀에게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말을 계속한다고 지적을 하더라. 개그우먼은 계속 울먹이며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또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에 관해 열심히 말했고, 그 의사는 욕먹는 원인은 열심히 하냐 아니냐 와는 별개의 문제, 즉 자신의 특정 발언 때문인데 원인 파악을 못하고 엉뚱한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꼬집는 영상이었어. 그런데 그 의사의 지적이 아주 정확하지 않니? 구설수에 올랐으면 해당사항에 관한 사과면 족하지 거기에 '열심히 했는데'의 변명은 사족에 불과하지. 열심히가 무슨 방패라도 되는 양, 열심히 다면 그걸 모두가 알아줘서 말실수쯤은 넘어가줘야 한다는 바람과 안일함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들어있는 거야.



지금껏 이 사회를 지탱해 온 절대 가치가 뭘까 따져보면 근면 성실 노력을 아우르는 단어 '열심히'가 아닐까. 우리는 늘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산다.(아이돌의 인사말조차도 그렇더라!) 공부 열심히 하고 직장 열심히 다니고 일 열심히 하고 자식 열심히 기르고 삶을 열심히 사는, 이 나라를 이만큼 잘 살게 만든 성장 동력이 사람들의 이 '열심히'의 마인드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절대적 가치를 획득한 '열심히'는, 그러나 이제는 재고의 여지가 있어 미래 세대에겐 좀 더 쿨한 다른 적당한 가치로 대체되어야 할, 제 역할을 끝내고 저무는 단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엄마는 불안정한 직업 때문인지, 노후생활에 관심이 많아서 자연히 노인빈곤, 은퇴자들의 이야기 같은 다큐멘터리를 잘 본다. 누구보다 열심히 생을 살았던 일명 '끼인 세대' 60년 대생들의 준비되지 않은 60 이후의 삶을 보니 또한 '열심히'의 함정이 보였다. 소수의 연금생활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년이 불안했어. 열심히 산 것은 그들 소수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텐데도 자식에게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그러니까 자식들 교육시키고 뒷바라지하느라 노후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그럴 여력이 없었다고 대부분 말했다. (노년의 생활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하는 소위 '자식리스크'를 대부분 피해 갈 수 없었어. 우리 사회의 특수한 현상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공부를 붙들고 열심히 매달린 것의 결과가 다수의 불안정이라면 안타깝게도 이것은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달까.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또 학부모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더 이상은 아니라 생각되었어. '열심히'에도 정확한 과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방향성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 나의 '열심히'가 결실을 못 맺는 참담함을 불러올 수 있으니.


그러나 은퇴 후에도 무슨 일이든 해야 생계가 가능한 부모들 중 자식의 기나 긴 공부 뒷바라지를 후회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일을 그만둘 수 없는 노년의 처지에도 그래도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오히려 위안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 그들 중는 또 자식의 어린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몸을 바지런히 놀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 시대의 젊은 부모들도 무슨 유산인양 대물림 하여 그들 부모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헬리콥터가 되길 자처해 자녀의 주위를 빙빙 맴돌며 시간과 노력을 열심히 바치는 그들 중, 희망의 탈을 쓴 욕심을 가지지 않은 이는 없을 거다. 내 사생활쯤은 포기하고라도 자식 공부에 열심히 매달리면 장밋빛 결과만을 얻을 거란 막무가내의 무의식, 어쩌면 안일함, 그것이 보인다.

미래는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니라고 새 시대에 뒤떨어진 우리의 교육시스템에, 그것을 위한 사교육에 천문학적 돈과 노력을 열심히 투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라고 어느 선각자가 외친들 먹혀들까. 그만큼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 한마음 한뜻으로 열심히 지켜 온 이 '공부 열심히'의 가치들을 한순간 묵살하기란 당연히 힘든 일일 거야. 그러나 분명 다시 생각再考은 해봐야 한다. 과녁설정을 다시금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




어때? 열심히 한다는 것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지 않니?

우리 이도가 곧 살아갈 세상에도 '열심히'가 마땅히 지녀야 할 가치로서 여전히 사회 안에 통용되며 또 한편으론 강요되고 있을까. '열심히'가 강조되면 그 너머 무의식엔, 열심히 했으니 응당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리란 '욕심'이 자동으로 따른다. 하지만 현실은 반반, 결과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실망하고 좌절한다. 참고 열심히 한 것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들지.

나는 열심히 죽어라 경기에서 뛰었는데 못 이기면 좌절하고 죄인처럼 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사람들로부터 욕먹으면 그 이유를 몰라 괴로워한다. 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여전히 가난하다면 어떨까.

열심히 한다고 결과까지 좋아야 한다 바라는 그 마음과 태도가 사실은 세상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얘기야. 열심히 사는 것과 관계없이 태어나보니 금수저인 이들의 등장과 꼴사나운 행태도 봐야 하고 열심히 가족 부양하느라 일찍 출근길에 오른 어느 가장이 큰 비에 불어난 흙탕물에 떠내려가 사라지는 아픔도 우리는 봐야 하잖니. 삶은 이렇듯 순진하게 흘러가지 않아. 열심히는 내가 내 삶을 대하는 태도에 한정된 것일 뿐, 결과를 자꾸 가늠해 보는 것은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점괘에 휘둘리듯, 한낱 어리석은 공상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김연아 선수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을 그녀가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렇게 웃으며 털끝만큼의 미련도 없이 아이스링크를 떠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건, 할 만 큼 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당당함과 결과는 그녀밖에 있다는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지 않겠니.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남은 듯하다. 네가 궁금해할지도 모르는 것. "어떤 게 최선을 다하는 건가". 열심히를 넘어 선 듯한 단어, 최선. 엄마도 지금, 개인전 후에 생각하고 있는 것. 내가 매일을 갖은 귀찮음을 뿌리치고 그 어떤 장애를 넘어, 해 볼 만큼의 노력과 의지를 전적으로 투여했는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찝찝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너에게 그 정도의 에너지만이 요구되는 일이었단 거야. 정도를 너무 높게 설정한 데서 오는 불안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결국 후회나 미련은 불필요하다. 네가 좀 더 살아보면 느끼겠지만 정말로 그리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땐 120%, 200%의 힘도 내게 된다. 내 한 몸 불사른단 말이 있지? 그런 일은 생에 몇 번 정도 될 수 있다. 어떤 간절함이 초인적 힘을 내게도 하지만 인생에서 이런 간절할 일이 자주 있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일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너의 엔진이 그렇게까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의 생존이나 갈망에 크게 부합하지 않는 일이었다고 결론짓고 후회하는 대신 "이 정도도 괜찮아!" 하고 만족하면 아주 좋을 것 같구나. 엄마도 그래서 만족하려고 한다. 이번은 이대로 만족하고 다음의 발판 삼으리라 결론짓는다. 늘 회의적인 것도 좋지 않다. 때론 만족할 줄 알고, 접고 가는 것도 괜찮다.



'열심히'는 앞서 말했듯, 사회로부터 또는 타인으로부터 또는 관습으로부터 강요되거나 혹은 정당성이 부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바라는 결과만을 위한 욕심도 아니야. 그것은 단지 나를 대하는, 나의 삶을 대하는 스스로의 태도에 관한 문제야.

엄마는 남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한 수채화가 영 늘지를 않고 그러다 보니 엄청나게 하기가 싫었다. 오냐, 한 번 해보자! 문득 걸린 오기가 발동해 한동안 휴일까지 학원에 나와 열심히 그렸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해 수채화 강사까지 하게 됐다. 더 어릴 때 엄마는 고무줄놀이를 못했어. 그래서 그것보다는 잘하는 피구를 좋아했다. 집에서 무료함을 때우려 조그만 공으로 벽에다 던지고 받고를 매일 했는데 이런, 나중에 학교에서 피구시합을 하는데 못 잡는 공이 없는 거야! 남학생의 공까지 덥석 덥석 잡아내고 그 아이들의 의아한 표정을 보게 되자 희미하게 '아, 이게 연습하니 더 잘하게 되는구나'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엄마가 이 악물고 이것들을 해냈을까? 아니야,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매달렸더니 엄마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들을 얻은 거야. 휴일까지 나와서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없었고, 매일을 공 던지기 연습하는 아이도 없었다. 남들이 쓰지 않는 자투리 시간을 내가 가져와 썼더니 원하는 결과가 되어 돌아오더구나. 함정은, 그렇게 시작하더라도 결국은 재미가 있어진다는 거다. 그러니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거겠지. 열심히 한다는 특별난 의식 없이, 하다 보니 오히려 재미도 있어서 한 발 한 발 이루어낸 것들이, 나중에 돌아보면 아, 그때 내가 열심히 했구나, 그때 정말 좋았었다 행복했었다, 깨달아지는 것들이 진짜 '열심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더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 귀중한 경험이 나를, 스스로를 믿는 힘이 된다. 이건 그 무엇보다도 크나 큰 자산이다. 난관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지. 큰 일 앞에서 긴장하거나 걱정하더라도 결국은 해낼 거란 믿음으로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 (열심히는 이럴 때 정확히 들어맞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개념이지. 열심히는 바라는 당연한 결과, 욕심이 아닌 '진일보'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거야.)

나를 믿는다는 것, 이런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를 칭찬할 일이, 나만 아는 뿌듯함이 차곡차곡 쌓일 때 그때 생기는 거야. 그러니 뭔가를 진득이 해내는 인내심이 필요한 거지. 꾸준히 하면 지금 잘 못하더라도 되어가는 중이고, 결국은 잘하게 될 거고, 그만두면 계속 못하는 일로 남게 된다. 기억하지?



기억하지, 이도? 엄마는 너에게 열심히 잔소리해 대는 대신에 이렇게 글로 남겨 네가 필요할 때 스스로 찾아보게끔 만들었다. 엄마의 꼼수가 꽤 괜찮지 않아? 지금 매일 하는 잔소리는 할 수 없이 좀 들어줘라. 이제 배우는 단계인 너에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가지가지 일들이 있잖아. 엄마도 잔소리가 아니라 가르쳐주는 것이 되도록 신경 쓸게.

그러나 오늘 아침도 나의 나무람에 네가 여유 있게 딴청을 피우는 바람에 나는 또 'loser'가 되고 말았다. 휴. 즐겁게 사는 너를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옭아매는 건 아닌지, 내 올가미를 가벼이 비껴가는 네가 언제까지나 승자로 남을 듯하다. 삶은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즐겁게 사는 것이란 걸, 어리석은 엄마가 중간중간에 까먹어도 지혜롭고 다정한 네가 일깨워다오.




오늘도 비가 많이 온다. 습기제거에 도움 될까 해서 화장실에 켜놓은 향초의 향이 은은하고 동료작가가 선물해 준 커피의 향과 맛도 아주 좋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베란다 너머로 흩뿌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어제 오전, 잠깐 그친 비에 서둘러 산에 갔다 내려오는데 온통 개울이 된 길을 첨벙첨벙 걸으며 마치 어린 시절 시골 냇가에 들어선 듯, 차가운 물의 감촉을 발끝으로 느끼고는 즐거워하던 나는 갑작스레 이 비가 앗아간 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향해 이는 죄스러움에 당혹했다. 철없는 나의 감수성을 나무라면서 그들을 위한 명복을 마음속 깊이 빌었다. 이 비가 야속한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그 무엇도 아닌 비. 자연의 무심함은 때때로 인간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그저 내리는 이 비에 애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만, 어서 그쳐 주기를 또한 빌어본다.




JULY. 2023. 엄마의 스무여덟 번째 편지.


그림 그리기에 심취한 이도. 열심히 하네? 엄마가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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