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너는 또 괜히심술이 나서는 거실에 누워 울면서나는 엄마 싫어 하더구나. 미니 싫어, 티거 싫어, 상어가족 싫어는 했어도 엄마 싫어는 아직 안 했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싫다니. 정말이야? 하고 물으니 응. 그런데 어쩌냐, 진심이 아닌 게 다 티가 나는데. 그러려면 곧바로 안겨오지나 말 것이지, 요 녀석아.
이도는 지금 미운 사람이 있니? 친구 아니면 선생님? 아빠? 혹시 엄마?? 어떤 이가 너의 가슴 한 자락을 채우고 너를 힘들게 하고 있을까. 네 나이 평생 미워하는 이를 마음에 몇이나 담아 왔을지. 엄마 나이 평생, 이제껏 많이도 미워하면서 살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미운 사람은 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이 또 휙 뒤집어져서 미움이 차오를 땐 가까이 있는 너의 아빠부터 시작해서 맨날 고성으로 시끄럽게 하는 이웃까지 온갖 미운 이들로 가득 찬 마음은 괴로워만 진다.
가장 최근까지 엄마가 미워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이다. 학교에 새로 부임해 온 그는 처음엔 엄마를 상당히 예뻐했었다. 물론 엄마도 새로운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발표도 잘하려고 애쓰고 성실한 모습을 보였지.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선생님의 태도는 돌변하여 6학년 내내 티 나게 엄마를 차별하며 미워했고 그것은 근래까지 큰 상처로 남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한 행동을 울면서 부모님께 말한 적도 여러 번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교육청에 고발하겠다고 했고 너의 할머니는 아무래도 학교를 한 번 찾아가야겠다고 했어. 엄마는 울면서도 끝까지 그러지 말라고 했고. 그때는 촌지가 심심찮게 오갔어서 할머니는 으레 그런 걸 원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신 거고, 엄마는 돈으로 무마하긴 오기로도 싫었던 거지. 학급에서 필요한 돈이 있을 땐 엄마를 꼭 집어서 집에서 받아오라 하거나, 내 테니스공이 본인 것 보다 좋아 보이면 허락 없이 또 고맙다는 말없이 바꿔가거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에게 발표 한 번 시키는 일 없이, 너의 할머니가 선생님 몫으로 싸준 김밥을 남학생들에게 풀어놓으며 뭐라고 험담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그리고 '지도위원이란 녀석이!'로 시작하는 꾸중을 들어가며 마음속에 선생이란 존재의 미움을 어쩌면 이때부터 은연중 키워가며 6학년을 갈무리했다.
그 선생님이 어느 순간 생각나는 때가 오면 걷잡을 수 없는 미움이 일어났어. 그때 그는 어린 나를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대했을까. 지독한 괴로움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 전 엄마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그 선생님을 봤어. 별로 늙지도 않고 그때 모습 그대로 인 듯 보였다. 아니, 내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로 느꼈던 것일지도. 지하철에서 공공근로하는 노인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뭐라고 항의하는 듯한 모습이고 짜증이 묻은 얼굴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어. 엄마는 그런 그를 보는데 묵은미움이 놀랍게도생생하게 치밀어 올랐다. 흥,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먼저 승강장에 도착해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엄마는 불쾌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뒤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산을 타는데, 학교 때의 이런저런 기억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던 듯 해. 엄마의 재주라면 재주랄까, 선생님 흉내를 곧 잘 냈고 친구들을 웃겼지. 중학교 때 엄마의 흉내에 박장대소하던 친구들의 얼굴 위로 문득, 어느 날 웃기는 선생님의 발음을 용케도 포착해 흉내 내는 6학년때의 내가 떠오르는 거야. 뒤에 선생님 자리에 앉아있는 선생님을 의식하면서 열심히 흉내 내고 아이들을 웃겼다. (어린 엄마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열심히 흉내를 낸 거였단다...) 흘끔흘끔 살폈던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확실히 떠올랐어. 그때, 불현듯 퍼즐이 딱 맞춰졌다! 지금껏 알아내지 못한, 그가 나를 미워한 이유가 무슨 계시처럼 바로 그 순간 알아채졌지 뭐야! 아, 나는 얼마나 눈치가 없는 아이였던지. 자신을 흉내 내는 상대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있고 정반대의 사람이 있는 건데, 하필 그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한 거지. 그 좋지 않은 표정을 왜 나는 응원으로 읽고 그리 설쳤을까. 그러고는 미움받고 일 년을 눈칫밥으로 살았을까. 그런데 아니? 이유를 안 순간 30년 묵은 미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말이야! 이제 그를 우연히 지하철에서 본대도 엄마는 오히려 피식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뭐야, 그거였어?' 생각하며.
도대체 그는 나에게 어떤 모멸감을 받았기에, 고작 11살짜리 아이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사람의 미움은 이다지도 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를 강도를 달리하며 30년을 미워했다.
그러나 그도 어른이며 선생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고 무엇이든 치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사람의 크기는 제각각이고 옳고 그름의 기준도 다 다르며 민감도도 천차만별이다. 어느 날 우연으로 얻게 된 해답에서 한 사람을, 그가 처한 상황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깊이 깨달은 엄마는, 해방감 또한 얻게 되었어. 그리고 한편으론 그가 진정으로 가엽게 느껴졌다. 그 인생도 고될 거야.
그래서 가끔 네가 미워지려고 할 때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나의 말대로 따르지 않는 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보여서. 아무 해가 없는, 어떤 의도도 없는 너의 행동을 나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 양 착각하려고 하는 나를 얼른 저지한다. 정신을 차린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실은 나의 문제임을 아는 것이 마음의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원래 그런 성격의 상대를 향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괜한 오해를 하는 것일 수 있어. 상대가 설사 정말로 악의로 고의로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해서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을 때도 한 번 잘 생각해 봐야 해. 네가 모르는 어떤 원인이 상대의 행동을 유발했을지. 엄마의 경우를 봐. 네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상대의 치명적인 부분을 너도 모르게 건드리면 그의 반응이 거친 방식으로 너에게 오고, 너는 그의 미움에 갇히게 된다. 너도 그를 미워하면서.
상대의 미움의 그물에 갇히지 않으려면 그냥 피해버리는 게 상수다. 만날 계기가 줄면 마찰도 그만큼 없어질 테니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대라면 그냥 이해하고 맞춰주는 게 낫다. 같이 미워하는 것은 다만 너를 다치게 할 뿐이야. 또한 맞춰주고 이해해 주는 것은 미움을 흡수하고 상황의 주도권을 너에게로 돌리는 초고단수다, 물론 매우 어렵고. 이것이 어렵다면 그저 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즉, 상대의 미움을 반사해 버리는 것이 차선은 될 거야. 네가 미움받는다 느낄 때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의 일로 두는 거지.
반대로 상대가 미울 때는 너의 고집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지 살펴야 한다. 상대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언행이 언짢은 것도 태도가 거슬리는 것도 내 생각에 벗어난 행동을 상대가 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하지 않는 상대가 미운 것은 상대가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 발상이지 않아?
'상식적'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야. 저 사람은 상식적이지 않다,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행동이야? 하는 말들에는 내 생각을 상식에 포함해 정당화하려는 안일함이 있을 뿐이지. 예컨대 상식적이지 않다, 통상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상식과 통상을 벗어날 자유가 모두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 오랜 아집과 잣대로 상대를 평가해서 그 기준에 들지 않았을 때, 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미움은 사실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알고는 있지만 머리로는 아는 일들도 막상 확 하고 일어나는 미움 앞에선 그저 무용지물, 오랜 습관을 버리기란 사실 쉽지는 않다.
내 방식, 내 틀을 고집함에 일어나는 미움이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라면 힘들더라도 개선을 하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다. 내가 어떤 경우에 참을 수 없어지는지 어떤 일에 걸려하는지,나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개선에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나와 다른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남의 허물을 그저 보아 넘길 수 있고 내 눈에 선 행동과 언행을 그저 바라볼 수 있으려면 외부로 향한 에너지를 나에게로 돌려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상대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지나치게 신경을 안 써버리고 미운 이에게 신경을 꺼 버리는 거야. 고장 난 스위치같이 저절로 켜져도 끄고 또 끄고. 남을 미워하는 것은 사실 엄청난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낭비하는, 말하자면 나 스스로 자초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이 인지는 일차적으로는 마음을 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상대를 미워하는 게 내 잘못된 인식 때문인 것을 아는 게 훨씬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거다. 그의 입장에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아는 것, 그의 생각과 환경과 수준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 나의 생각과 인식에 맞지 않다고 그가 잘 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안 되더라도 이 사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미움을 해소하는 근본에 가까운 태도가 아닐까.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 자각과는 별개로실천의 어려움을 깨닫고 계속되는 실패에도 자학하지 않아야 돼.나 자신 또한 별 다르지 않은 수준의 인간임을 인정하고 계속 연습해 나가는 거야.
누군가를 너무도 미워해서 그를 향한 복수로 전 인생을 바치는 이야기는 아찔하고 통쾌하고 또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실현하기 힘든 일이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펼치는 복수극은 엄청난 공감과 대리 만족을 주는 건지, 복수를 한 장르로, 예술로 승화시킨 영화감독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복수 뒤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는 과연 복수를 완성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생을 살았을까. 그 지독스러운 미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었을까. 복수로써 마음에 품은 한을 진정 끝맺음 할 수 있었을까. 누구를 미워하는 것에 내 인생과 목숨을 거는 것은 현명한 것일까. 어리석은 것일까.
살 떨리는 복수의 이야기는 그저 픽션으로 남겨두자. 여기 소소한 다툼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우리들'.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이 미워하고 싸우고 자존심 대결을 하는, 어른을 위한 현실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엄마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뭔 줄 아니? 주인공 선이가 단짝이었던 지아와 사이가 틀어지고 다시 외톨이가 되었는데, 바보같이 동생 윤이도 친구에게 맨날 맞아서 오니 화가 나서 다그친다.그렇게 매번 당하면서 왜 놀고 왜먼저 말을 거냐고. 자존심 때문에 갈등을 부추기는 누나에게 유치원생 동생은 정말로 묻는다. "그럼 언제 놀아?"
엄마가 말했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치 않는 진리는 있다고. 누구의 입으로 말해지든 진리는 여전히 진리야. 다섯 살짜리 아이의 입을 통해서도 진리는 전해질 수 있다.
애초에 우리는 미움으로 허비할 시간 같은 건 없음과 상대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순수함이 있음을 알았지만 잠시 망각한 채 헤매는 것은 아닐까.
노는 데, 나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어떤 데 내 에너지를 쓸 수 있는 지혜를, 자질구레한 갈등은 무시할 수 있는 과감성을, 그 근본적 순수함을 얼른 찾아와야지.
미워하고도 금방 나에게 안길 수 있는 지금 네가 지닌 깃털 같은 미움의 무게를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