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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Jun 05. 2023

엄마가 된다는 것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스무다섯 번째 편지



오늘 너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서 또 돌아오면서 낯선 사람과 이웃과 몇 번의 인사를 주고받은 줄 아니? 아침마다 등원길에 마주치는 아파트 청소를 해주시는 아주머니께서 네가 요새 안 보인다 물으시기에 요즘 좀 일찍 나와서 못 마주쳤나 보다고 구김 없이 말하는 나의 모습에 참 많이 변한 내가 느껴졌다.

어제 너를 하원시키면서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받고, 오는 길에 또 몇 번의 안면치레를 했다. '과일하삐'라 부르는 채소트럭 아저씨에게 매일 인사하고 이웃과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것은 너를 데리고 다니면서 생긴 변화야.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마주치면 늘 내 뒤에 숨는 너 때문에 말을 걸어오는, 그게 아니라도 귀엽다며 말을 거는 이웃이 늘어나고, 그러면서 인사하고 내리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본체만체하던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다. 흔쾌히 웃으면서 다니는 건 참 기분 좋아. 알아도 전엔 성격적 이유로 그렇게 못했고.


오늘 아침엔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달팽이들이 계단 옆 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계단도 길도 다 물기 촉촉이 젖어 있어서 네가 무서워하는 개미도 보이지 않았지. 그런데도 너는 또 계단에 있을 개미를 무서워하면서 업어달라, 안아달라 졸랐다. 늘 그렇기에 너를 반쯤 안고 어기적 내려가다 엄마의 눈에 달팽이가 귀여워 너에게 보여주려 했다. 달팽이 귀엽지~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했기에 너를 좀 내려놓으려는데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안 떨어지려는 거야. 그러다 보니까 진흙 묻은 네 운동화에 내 바지가 좀 버렸다. 그러니 또 내가 옷을 팍팍 털며 짜증을 냈지. 무서워~ 칭얼거리는 너에게 그렇게 무서우면 앞만 보고 걸어, 왜 땅 보면서 개미를 찾냐, 무슨 겁이 그리 많냐, 필요하지도 않은 말을 했고. 시무룩해져 있는 듯 보이는 네 표정에 내 마음도 안 좋아졌지.


어제는 아침을 먹는데 빵가루며 과일을 흘리길래 턱받이를 해줬다. 그게 싫다고 짜증 내는데, 흘리니까 하고 먹자, 하니 듣지를 않고 더 짜증을 냈지. 그래. 거기서 그냥 잘 벗겨줬으면 됐는데 내 말 안 듣고 떼쓰는 네가 미우니까 나도 턱받이를 확 벗겼단 말이지. 그러니까 무안했는지 너는 왠지 더 크게 한참을 울었다. 나는 그냥 모른 체 아침을 먹었고. 너는 안 먹겠다고 떼를 쓰고 나는 먹지 마라며 네 접시를 뺏고, 달라고 울고 또 주고, 몇 번 반복하다 너는 포크를 다시 들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참외를 씹는 너를 보는데 참, 잘 안된다 싶더라. 너의 행동에 성질이 확 올라오는 그걸 바꾸는 게 말이야.

너의 눈물을 닦아주고 우리는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엄마가 되면서 엄마는 크게 두 가지가 달라졌어. 하나는 이웃과 -적은 수의 이웃이라도- 인사를 하는 것. 또 무엇이 본질인지 늘 생각하는 것.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아마 없을 거야.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서 키우기에 엄마도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오히려 많은 것 같다. 이 경쟁사회에 뒤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험한 세상 좋은 스펙으로 잘 살아가게 하기 위해, 남들에게 주눅 들지 않게 하기 위해 돈을, 에너지를, 감정을 쏟고 있지. 그래, 자식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부모는 제 나름대로의 합당하고 타당한 이유로 자식들에게 이것저것을 시키고 주입하고 따르게 한다.




이제 한 일 년이 되어가나 보다. 엄마는 작년에 한 유명 지상파 프로그램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강력사건과 미제사건들을 다루거나 각종 이슈가 되는 사회문제, 사건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인데 엄마는 엄마의 친구일로 담당작가의 연락을 받았고 그저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 요청해 온 인터뷰에 응했다.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친구와의 기억을 더듬어 증언했고 마지막 피디의 말에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친구는 2017년 늦은가을, 엄마의 개인전에 왔었어. 저녁땀에 와서는 같이 저녁도 못 먹고 다시 일하러 들어가 봐야 한다며 곧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서로 바빴는지 연락이 없다 몇 달 뒤 느닷없이 친구 엄마가 좀 봤으면 좋겠단 연락을 해왔고 왠지 모를 불안함으로 거의 반은 울면서 택시를 타고 갔다. 친구는 가출을 해 전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라 했고 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애끓어하는 친구 엄마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 엄마에게서 벗어나 좀 자유로운 삶을 찾아 스스로 떠났다 생각했지. 친구의 결정에 응원을 보내며 어디 있든 지금보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잘 지내기를 바랐어.


그리고 몇 년째 소식이 없었다. 그저 잘 살겠거니 가끔 생각했는데 작년에 갑자기 강력반형사에게 전화를 받고 방송국작가에게 전화를 받고 하는 일이 생긴 거지. 인터뷰 마직막에 피디가 전해준 말은 '카드 사용이나 의료기록 등 전혀 생활반응이 없고 경찰에서도 그렇고 자신들의 판단에도 사망상태로 보인다'였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동안 극도로 꺼려져서 하지 못했던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지.

연락하지 못했던 몇 년간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고 친구는 어쨌든 행방불명 상태였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소식을 캐는 과정에서 방송국의 귀에도 들어가고 단순실종으로 마무리될 뻔했던 사건이 재수사되는 행운? 까지 갔는데 친구 엄마는 친구가 어떤 남자에게 가스라이팅 당해서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아이가 세뇌되어 일이 이렇게까지 됐다고 생각하시는 듯했어. 그러나 가 가슴 아팠던 것은, '쌍둥이 언니처럼 당당하지 못해 좀 그러라고 푸시했고 다 저 잘되라고 그랬다'는 그 엄마의 말이었다. 엄마는 그 말을 듣는데 참, 친구는 아주 외로웠겠구나,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알기로 내 친구는 그 엄마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당당하고 아무 꿀릴 것 없는 아무 모자람이 없는 아이였다.


엄마는 그 친구와 고등학교 때 미술학원에서부터 알았는데 늘 자기 엄마와 갈등이 있었다. 자세히 밝히진 않더라도 엄마는 친구에게 들어 자신과 그 엄마와의 갈등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몇 가지나 알고 있어. 행동에 통제가 많았고 요구사항이 많았던 것 같은데, 엄마가 보기엔 친구가 그 요구사항들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잘 들어주는 편이었던 것 같다. 한다미로 착했어. 생각해 보면 날이 갈수록 어떤 그늘 같은 게 가끔 보였는데 마지막 엄마의 전시에 와서 '그래도 너는 계속 발전을 하는구나'하고 건넨 말에 그 그늘이 더 짙게 느껴졌달까. 친구는 가출 전날 평소와 다르게 밤늦게 귀가를 했고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소리쳤다는구나.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이렇게 간섭하느냐고.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또 떼어낼 수 없는 소중한 사이는 부모자식 간이겠지. 또 이 세상에 자식을 걱정하지 않는 부모는 없겠지. 부모의 눈에 자식은 마냥 어리게 보이고 마냥 미숙하게만 보이는 걸까. 성인이 되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여 남 대하듯 집착을 끊어낼 수 없는 것일까. 긴긴 시간 자식에게 투자하고 보살피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리 되지 않는 것일까. 자식은 언제까지나 부모의 소유물이라 인식하는 걸까.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되면 미운마음이 드는 것일까. 내 말대로 따르는 자식만 예뻐 보일까. 부모가 틀릴 가능성은 당연히 있고 그래서 아무리 자식이라도 내 생각과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단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 자식이 설사 공부를 못해도 말썽을 부려도 무섬을 많이 타도 세상의 어떤 기준에 못 미쳐도, 어떻더라도 그게 내 자식이면 엄마 된 자로 그를 그대로 인정하고 따뜻하게 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부모의 입맛과 욕망대로 자식을 바꾸지 못해 안달한다. 너는 누굴 닮아서 공부를 못하니 누굴 닮아서 키도 작고 못생겼니 누굴 닮아서 이도 부실하고 눈도 안 좋니 누굴 닮아서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니 누굴 닮아서 성질이 그 모양이니. 어째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니. 온갖 것들을 타박하고 트집 잡는다. 생각해 보면 일상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들을 내뱉는 거야. (닮긴 누굴 닮았겠니, 자기 유전자 물려주고 자기가 키웠는데 자기 닮았지! ) 이런 말들은 결국 자기 얼굴로 뱉는 침, 아이에게도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삼키고 삼가야 할 말들이지. 세상이 하지 않는 비난도 부모가 앞서하고 쓸데없는 조롱과 야단을 한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내면화될 열등감을 끔찍하게도 누구도 아닌 부모가 심어준다. 다 자식 위해 한다는 그 말을 한 번이라도 역지사지해 봐야지 않을까. 아이는 나 못지않은 저만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또 제 부모를 본다. 섬찟하지. 그 눈에 인식되는 내가  어떨지, 그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그저 내 자식을 내가 낳은 그대로 옳게 봐주고 믿어주고 역할을 할 수 있게 놓아준다면 어떨까. 그저 건강히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면 어떨까.


'언제나, 네가 어떠할지라도 너를 사랑한다'는 신호. 사람은 '나는 늘 사랑받는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가질 때 진정 충만한 자아를 가지게 될 거야. 그런 감정적 안정, 즉 '안전지대'가 되어줌이 부모 된 자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지 않을까.

그래, 다만 최소한의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것이 엄마 된 자의 유일무이한 역할이 아닐까 한다. 밖에서 어떤 난투를 벌이고 왔어도, 내가 타인으로부터 비난받는 인간이 되었어도, 세상이 비웃는 어떤 실패를 했어도 그저 '괜찮다' 다독여주고 쉬게 할 그런 안전지대. 내가 못하고 있을 때, 실수하고 있을 때, 그래도 괜찮다는 '안전신호'를 받은 사람은 그 안정감을 버팀목 삼아 어려운 순간을 잘 극복할 수 있다. 그런 든든한 안전지대가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를 나가도 무슨 거리낌이 있을까. 세상의 어떤 처세술도 돈 버는 기술도 거리낌 없이 세상을 대하고 자신을 대하는 이 긍정적 자세보다 더 좋다 할 수 있을까.




요즘은 또 '초등의대반'이 광풍으로 학원가를 휩쓸고 있다지. 수입이 보장된 의사가 되려면, 그래서 의대를 가려면 최소한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하고 부모들이 먼저 요구하여 학원들마다 번져나가고 있는 모양이더라. 또 어떤 덴 8주에 천만 원의 고액에도 자리가 다 찬다고 하니...

다른 경험을 모두 배제한 채 유년시절을 희생시키고 오직 죽은 공부만 주입시켜 의사를 만든다 해도 그 아이들 중 부모의 그런 선택에 감사하고 자의적으로 직업적 소명을 갖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모든 직업에서 그렇겠지.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그 직업을 선택했을 때, 거기에서 어떤 사명감과 보람과 진정한 자존감과 자기실현을 이룩할 수 있을까.) 엄마들은 왜 그렇게 아이들을 아바타로 만들고 싶어 할까. 우물 안에 가두려 할까. 자신의 생각에 어떻게 그렇게 확신이 강하면 열산 난 아이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걸 수 있을까. 엄마의 좁은 소견으로는 무서운 생각까지 든다.


세상엔 사람의 모양도 층층이다. 세상이 선호하는 것을 좇는 사람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 층층으로 섞여 있어. 그 어떤 쪽도 세상의 큰 물결에 영향받지 않을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본인의 확고한 삶의 방향성이 없으면 쓸려가기 쉽다. 말했듯, 모든 엄마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 행동한다. 4학년부터 잠안재우고 공부시키는 것도, 40다 된 딸 간섭하는 것도 다 엄마들은 자식을 위한 그들 나름으로의 경험과 사랑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해.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 학원비 대는 돈은 아까워 않는 열성은 남들처럼 그렇게 해야만 자식이 잘 된다는 믿음 때문이잖아. 그러나 막대한 돈을 투여하지 않고 마음씀으로 단단한 자아를 채워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드무니까, 불안하겠지. 그러나 진정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우리가 선망하여 가고자 하는 집단에서도 몇이나 될까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과 행복은 직업이 가져다주는 것도 부와 명성과 화려한 주거가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지. 끊임없는 타인과의 비교, 평가, 세속적 기준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까 직업을 갖게 해주는 것, 돈을 주는 것, 타인에게 뒤처지지 않게 물질적 지원을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간섭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있든 없든, (감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나는 이미 완전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깨닫하는 게 중요하단 거지. 무균실을 제공해 주는 능사가 아니라 면역력을 길러줘야 하고, 고기는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온실 속의 화초가 몰아치는 광풍에 온실을 잃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엄마는 엄마 된 자로서 늘 본질을 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마.

엄마가 생각하는 양육의 본질은 너를 많이 안아주고 지켜봐 주는 것.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것. 네가 나를 안전지대로 느끼게 하는 것이야.

그리고 때가 되면 네가 잘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네가 스스로 음식을 해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리 정돈하고, 그렇게 너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엄마가 잘 도와줄게. 엄마는 그러지 못했지만 너는 성인이 되어서 너 스스로를 잘 돌보는 완전한 성인이 되도록, 엄마는 그렇게 못해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같이 잘 해나 가보자.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엄마가 된다는 것은 참 어렵고도 또 굉장한 일이다. 너를 위해 내가 머무르지 않고 나아질 용기를 가지게 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은, 누차 말하지만,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야. 내가 잘 살아야지, 내가 너에게 전할 가치들을 내가 우선 잘 실천하고 살아야지 네가 따라 배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부족한 사람이고 실수하지만 엄마가 마음에 새긴 본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 점은 염려 말아라. 왜냐하면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본질적인 것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따르기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새기기에 버겁지 않지.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부차적인 게 된다.


그리 알아채니 다신 없을 너의 어린 시절이, 지금이 정말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더 많이 안아주는 것, 더 사랑을 주는 것 밖에 무엇이 더 있을까. 커 나가는 너를 온전히 품을 수 있도록 엄마의 마음 그릇도 네가 커나가는 속도만큼 키우는 나날들을 보낼게. 너와 함께 하니 그날들이 행복하고 기쁘다. 그래, 까짓 거 사는 거 뭐 별거 있니? 오늘도 웃으며 살고 내일도 웃으며 사는 거지!




문득문득 친구의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산을 탈 때, 거리를 걸을 때. 불현듯, 대화했던 내용들이, 내 눈에 담았던 모습들이, 같이 했던 많은 일들이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너를 알고 지낸 20년의 세월, 우리의 시간들은 대부분 즐겁고 유쾌했지. 그 속엔 너의 엄마도 웃는 모습이다. 너는 웃는 모습이 제일 예뻐.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던 너. 네가 미국여행에서 사다 준 나뭇잎 모양의 귀걸이는 여전히 내가 제일 아끼는 거야. 어디서든 평온하길 바라고 바라고 바란다. 

내 추억에 함께해 줘서 고맙다, 친구야.




JUNE. 2023. 엄마의 스무다섯 번째 편지.


엄마와 이도의 단란한 한 때. 엄마가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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