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테이트 산문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열한 살쯤 나는 동네 옥상이나 지붕을 마음껏 뛰어다니고 우리 집 옥상에서 친구네 옥상까지도 가볍게 날아서 건너가곤 했다. 떨어질 리 없었고 떨어져도 죽지 않을 걸 알았다. 가끔은 얼굴도 모르는 친구 다섯 명과 동네의 악당들과 싸우기도 했다. 출동하기 전 우리 다섯은 동네에 세워진 허름한 봉고차에서 변신했다. 한 명씩 변신해서 멋진 슈트를 입고 폼나게 날아가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변신이 안 되는 거다. 게다가 나만 멋진 슈트가 아닌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답답했다. 얼른 변신해야 하는데.
이연걸 무협 영화, 우주특공대 바이오맨에 빠져 있던 열한 살의 나는 자주 그런 꿈을 꿨다. 정말 신기하게도 꿈에서도 꿈인 걸 알아서 어린 시절 많은 활약을 하고 다녔다. 물론 꿈에서.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생뚱맞고 우스웠다.
제임스 테이트의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는 일상과 몽상을 오가며 텍스트 안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평범한 일상이 전개되다가 느닷없이 그러나 매우 능청스럽게 꿈이나 상상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세계로 초대한다.
“내가 만약 염소와 잤다면?” 그녀가 물었다. 다른 두 테이블의 사람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지푸라기로 가득한 트레이시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운 좋은 염소지.” 내가 말했다. 우린 옆에서 우리 대화를 엿듣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절 바르게 미소를 보냈다.
―「잃어버린 한 챕터」 부분
앨빈이 고개를 드니 그녀가 유모차를 밀며 최대한 빨리 달려서 그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였다. 아기는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 펄쩍 뛰고 있었다. 이 여자는 진짜 빠르고, 또 못돼먹었다고. 여자는 아주 끝장을 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주운 1페니 동전」 부분
제임스 테이트는 “우스운 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 가슴을 찢는 시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낯선 현상 같으면서도 가만히 읽다 보면 한번은 느껴봤을 만한, 경험했을 법한 장면이다. 그런 일상을 언어로 세밀하게 감각해내는 위력이 대단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감정, 장면을 제시하면서도 그것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새롭고 낯선 체험은 일반적인 개념 안에 귀속시키려는 행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만담 같다. 희곡 같다. 엉뚱하다. 잠꼬대 듣는 것 같다. 꿈꾸는 것 같다. 비장하면서도 어쩐지 우습다. 헛소리 같다. 어린아이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그 아이에게서 인사이트 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뭐 이런, 재밌는 시가 다 있어. “내가 말했다.”에 홀린 것 같다. 시를 읽으면서 메모했던 내용이다. 가끔 화자와 청자가 뒤섞여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긴 했지만 “우리가 본 지금까지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았다.”는 최정례 시인의 말이 제임스 테이트의 시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시집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시를 소개하자면, 「호숫가에서 보낸 거의 완벽한 저녁나절」, 「잃어버린 한 챕터」, 「승진」, 「누구를 나는 두려워하는가?」, 「반쯤 먹힌」, 「주운 1페니 동전」, 「거룩한 토요일」, 「미스터 잔가지 말라깽이」, 「의무에 묶여서」, 「인터뷰」, 「규칙들」, 「애런 노박의 사건」, 「쿵푸 댄싱」, 「새해맞이」, 「어느 일요일의 드라이브」 등인데, 쓰지 않는 편이 나을 뻔 했다. 그냥 다 읽자.
제임스 테이트의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의 시 대부분이 행과 연의 구분 없는 산문시다. 「탄원」, 「기적의 항로」, 「마카로니」, 「케네디 암살 사건」을 제외한 모든 시가 1행 1연으로 구성됐다. 위의 네 편의 시도 1행 1연으로 봐도 무방한 시긴 하지만 세 페이지가 넘어가는 시에 단락 구분 없는 시가 대부분이었음에도 리듬이 탁월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글은 쓸모가 없고 문학은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고 했다. 또한 부재의 현실을 반복해서 재현하는 것이 예술의 특성이라고 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유머와 풍자, 고통과 연민 등을 반복적으로 재현한 제임스 테이트의 시는 즐거움과 부재하는 것으로 인한 결핍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농담인 듯하지만 뼈가 있고 의미 없는 말 같지만 그냥 하는 말이 없다. 제임스 테이트의 시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그가 쓴 쓸모없고 쓸데없는 시의 구절을 덧붙이며.
“나는 어떤 얼음 집게를 샀는데, 그것이 나를 놀랍도록 행복하게 했다.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는 그것을 사고는.
―「누구를 나는 두려워하는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