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학기가 시작됐다. 허둥대던 생각도 이리저리 부유하던 마음도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수강한 과목 중 전공 두 개는 과제 제출이었고 심리학 세 개, 교양 하나는 온라인 시험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시험 볼 땐 과제가 나은 것 같고 과제 할 땐 시험이 나은 것 같다.
전공 두 과목 중 하나는 <내 인생 쉽게 풀어쓰기>였고 교수님은 MBC 드라마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의 천지혜 작가님이었다. 중간고사 과제는 인생 질문 다섯 개를 뽑아 4,500자 내외로 써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다섯 개의 질문을 생각하는 것도 어려웠고 그 질문에 4,500자 내외로 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 써 본 4,500자는 써도 써도 끝이 안 보이는 분량이었다.
인생 질문에 답하기. 간단하게 생각했다가 마감 시간 몇 분 안 남기고 초고 수준으로 겨우 제출했다. 시험이 과제 제출인 경우 해당 과목 교수님께서 미리 과제 공지를 올려주시는데 공지만 보면 쉬워 보이는 것도 막상 쓰기 시작하면 한 줄도 쓰지 못해 조바심이 난다. 글을 쓰기 시작하니 대충 쓰더라도 쉽고 간단하게 쓰여지는 글은 없었다.
전공 두 과목 중 다른 하나는 <수필 쉽게 쓰기>였고 교수님은 에세이스트 고수리 작가님이었다. 중간고사 과제는 자유 주제 에세이 한 편 제출.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에세이를 쓰려고 앉으면 자꾸 쌍둥이 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을 부끄러워하던 열다섯의 나와 마주했다.
책상에 앉아 떠오르는 기억을 마구 적었다. 잊고 있던 장면이 하나둘 떠올랐다. 내겐 이 기억이 사무쳤었나. 텅 빈 학교 운동장, 나를 기다리던 동생, 땡볕에 집까지 걸어오던 그 길, 동생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휘몰아쳐서 결국 쓰다가 몇 번이나 울었다. 사무치고 미안했던 마음과 마주하면서 계속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 에세이에 동생을 향한 내 마음을 담았다. 백번도 넘게 읽고 고쳤다.
에세이를 제출하기 전, 편집장님과 글 쓰는 동료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글을 보내고 몇 분 동안 긴장감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름이었는데 몸도 추운 것 같고 손끝도 저리고 시렸다. 잠시 후 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은희 씨… 너무 잘 썼는데?”
너무 기뻤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떨림, 몇 번을 더 읽고서야 홀가분하게 내 이야기를 떠나보냈다. 쓰고 나서 정말 후련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 첫 에세이는 우수과제로 선정됐다.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금요일 퇴근길이었다. 너무 기뻐서 사장님, 편집장님, 내 글을 읽어줬던 직원, 학과 단톡방, 교회 식구들에게까지 동네방네 알렸다. 하루하루 설렐 일 없었는데 오랜만에 느낀 설렘이었다. 내 기분만 생각하고 너무 눈치 없이 자랑한 것 같아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되었지만, 그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단 그냥 축하받고 싶었다.
그날 고수리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글을 남겼다. 교수님께서 답장으로 피드백을 보내셨다. 백 개가 넘는 글을 다 기억하고 계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정성스런 답장이라니. 요즘도 생각날 때마다 종종 교수님의 답장을 읽는다. 쓰는 마음을 돌아본다.
은희님, 안녕하세요.
고수리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글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여러 번 다시 읽었어요.
담담하고 따스하게 글을 이어가는 작가의 시선에서,
이 작가가 살아왔던 삶과 삶의 태도가 그대로 느껴졌어요.
특히 어린 시절, 동생들을 돌보던 시절의 이야기에서 작가가 느낀 여러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어요.
동생들 손바닥 때린 것이 미안해서 나도 내 손바닥을 때렸다는 기억이,
모두가 돌아간 학교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동생들과 하교하던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 아이가 자라,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때.
정이현 소설가의 <말하자면 좋은 사람> 소설집에 실린 '또다시 크리스마스'라는 소설이 떠오르는 에세이였습니다.
특별한 소재나 유려한 기교 없이도
기본을 잘 지킨 단정하고 진솔한 글이었습니다.
여러 번 퇴고하고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글은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써주세요 :)
은희님만의 단단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마음을 나눠주는 작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걸음으로 나아가기를 응원할게요 :)
매거진 <싸대기>는 세종Cyber대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문예창작학과에서 배우고 쓰면서 만난 설렘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 기록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