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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Nov 20. 2021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배웅

내 동생은 쌍둥이다. 내 눈엔 암만 봐도 다른 얼굴인데 사람들은 도통 구분이 안 되는지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맞게 매칭을 했는지 항상 내게 묻곤 했다. 조금은 귀찮기도 하고 다음번엔 헷갈리지 않도록 입술 위에 점을 보고 구분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을 챙기는 일은 내게 일상이었다. 자신들의 이름마저 헷갈리는 내 동생들은 30대 후반이지만 여전히 유치원 아이 수준의 지능에 멈춰서 세상을 살아가는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동생들의 장애가 태어날 때부터였는지 사고 때문이었는지 부모님께 묻지 않았다. 내게 큰 짐을 맡긴 듯한 미안함, 동생들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을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생들을 챙겼다. 동생들이 말을 안 들으면 선생님인 양 손바닥을 때리기도 했다. 동생을 때린 게 미안해서 나도 내 손바닥을 때렸다. 밥때가 되면 엄마가 차려놓은 동그란 밥상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밥을 챙겨 먹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일하고 오는 엄마가 피곤할까 봐 동생들과 밥솥에 쌩 밥을 한 솥 해놓기도 했다. 하나에 10원 하는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100원어치 사면 항상 동생들에게 4개씩 주고 내가 2개를 먹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반찬이 있으면 내가 먼저라며 동생을 기다리게 한 나는 참 못된 언니였다.


내 인생에 동생들 때문에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중학교 때였다. 우리 학교에 특수반이 있어서 동생들과 같은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사춘기가 되니 서서히 동생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동생들을 마주칠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복도를 지나갈 때, 매점을 가야 할 때, 조례할 때, 운동회 할 때 등등 동생을 마주치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곤혹이었던 것은 토요일이었다. 당시엔 같은 동네 아이들끼리 한 달 치 차비를 내고 봉고차를 타고 등교하는 게 유행이었다. 학년별 등교 시간에 따라 1,2차로 봉고차를 탔기 때문에 토요일은 선착순 탑승이었다. 동생들과 함께 타야 하는 나는 일부로 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났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교생이 넓은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텁텁한 흙먼지를 일으키는 신난 발자국 소리와 여기저기서 꺄르륵 거리며 재잘대던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나는 동생들을 데리러 계단을 내려갔다. 전교생이 휩쓸고 간 텅 빈 운동장이 바람에 쓸려 누구도 밟지 않은 땅처럼 맨들맨들 해 지면 이제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어린 나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부끄러운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편하게 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버리고 동생들과 함께 집까지 걸어갔다. 한여름 땡볕에 무거운 가방을 둘러매고 얼굴이 익을 대로 익은 동생들을 보니 내 마음도 벌겋게 익어버릴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나는 동생들의 책가방 두 개를 대신 매고 걸을 때마다 호주머니에서 짤랑짤랑 거리는 버스비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주었다. 세 개의 책가방이 내 어깨를 짓눌렀지만 내내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대학과 직장 때문에 나 혼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갖가지 짐들은 다 챙겼지만 가장 큰 짐 하나는 집에 두고 왔다. 나는 잠시 자유로워졌지만 이따금 두고 온 그 짐이 생각났다. 철이 들면서 부끄러움도 그리 부끄럽지 않게 되자 동생들을 늘 무거운 짐처럼 생각했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짐이 되었다.


어디서든 동생이 반갑지 않았던 나는 언제나 동생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집에 내려갈 때마다 “언니야 왔나~ 언니야 언제 올라가노?”라는 질문을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받는다. 그리고 터미널로 향하는 내가 안 보일 때까지 2층 집 마당 난간에 서서 큰 소리로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준다. 동생을 부끄럽게만 생각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내가 뭐라고⋯ 제대로 사랑해주지도 못했는데⋯.” 준 것 없이 받는 이 사랑이 정말 고마워서 버스 안은 늘 눈물을 삼키는 공간이 되었다.


언젠가 소원이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 “동생들보다 1분이라도 늦게 죽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동생들이 혼자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순간 누구보다 뜨겁게 인사해 주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배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처럼.




세종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고수리 교수님의 수필 쉽게 쓰기 중간고사 과제로 제출한 저의 첫 에세이이며, 감사하게도 우수과제로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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