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춥고 바쁘니 빨래가 잔뜩 쌓였다. 세탁기가 베란다에 있어 추운 날에는 세탁하기 겁난다. 장마철이나 추운 겨울엔 자주 빨래방에 간다. 집 안에 빨래를 널지 않아도 좋고 한 시간이면 빨래를 끝내고 착착 정리가 끝나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수건이 보드랍고 보송보송해져서 기분이 좋다.
평소에는 주말에만 세탁기를 돌린다. 평일에 빨래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 퇴근하고, 운동하고, 씻고, 청소하고, 집안 정리하고, 학기 중에는 강의도 들어야 하고. 그러다 시계를 보면 밤 10시가 훌쩍 넘어간다. 날은 계속 춥고 수건이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빨랫감을 챙겨 빨래방으로 향했다. 낮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일부러 저녁 시간에 갔다. 도착하니 세탁기 전부 사용 중이었다. 시간이 20분 넘게 남아있는 걸 보니 막 세탁이 시작된 거였다.
세탁기 네 대가 열심히 돌아가고, 기다리는 사람이 나 포함 세 명. 빨래방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챙겨갔지만 전혀 집중되지 않았다. 읽는 동시에 내용을 잊어버려서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길 반복. 그러다 책을 덮었다. 빨래방은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먼저 왔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건조기를 기다리는지 빨래를 기다리는 지도 눈치껏 파악해야 하니 이러다 내 차례를 뺏기면 어쩌지 영 신경 쓰였다. 그러다 한 명이 더 들어왔다. 괜히 조급해졌다. 오늘 책 읽기는 글렀다. 그는 아무래도 오늘 세탁하기 힘들 것 같았는지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며 돌아갔다.
20분 후 세탁기 세 대에서 끝났다는 알람이 울렸다. 빨래방은 여전히 우리 셋뿐. 빨래 꺼내는 사람이 없다. 10분 정도 더 기다렸다. 밖을 쳐다봐도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나는 계속 바깥쪽을 쳐다보고 기다리던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세탁기 앞을 어슬렁거렸다. 작은 한숨과 구시렁거리는 혼잣말이 들렸다.
이러다 마냥 기다리게 될 것만 같았다. 게시판에 적힌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 상황을 설명했다. 주인은 세탁이 끝났음에도 빨래를 찾지 않을 경우 세탁 바구니에 빨래를 빼놓고 다음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분실될 경우 책임지지 않는다는 글을 게시판에 공지해 두었다고 했다.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주인에게 온 메시지를 설명하고 빨래를 빼놓고 세탁기를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시간은 이미 25분이 지나고 있었다. 바로 빨래를 돌렸으면 빨래가 끝날 상황이었다. 어쩜 세 명 다 이렇게 안 오는 건지.
하지만 난감한 문제가 또 있었다. 세탁 바구니 두 개 중 하나에 이미 누군가의 빨래가 담겨 있었다. 빨래를 꺼내 놓을 바구니가 하나밖에 없는 상황. 빨래를 꺼내놓을 데가 없으니 세탁기 세 대 중 하나만 쓸 수 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언제 오려는 것일까. 세탁이 끝나면 알아서 세탁물을 꺼내놓고 세탁기를 사용하겠지, 하고 여유 부리는 걸까. 이 정도로 에티켓 없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해도 세탁 바구니까지 부족하니 화가 났다. 정말 날 잡았나 보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리던 우리 셋은 한 편이 되었다. 서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이래저래 돕고 배려하며 정말 우여곡절 끝에 모두 세탁기를 돌리게 되었다.
40분쯤 지나자 20대 커플이 들어왔다. 여자는 세탁 바구니에 자신의 빨랫감이 나와 있는 걸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기다리던 우리 셋은 동시에 그 커플을 쳐다보며 황당하다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커플이 세탁기 네 대 중 세 대를 사용한 것이다. 수건 따로, 속옷 따로, 검정 옷 따로. 수건과 속옷은 같이 돌려도 세탁기 한 대가 텅텅 빌 만큼 양이 적었고 검정 옷도 바지 두 개가 전부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툴툴대며 얼굴과 행동에 짜증이 가득했다. 남자는 우리 셋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치 보며 조심스레 행동했다.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자기 빨랫감을 함부로 만지는 것이 싫으면 빨래가 끝나기 전에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조금 늦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해도 빨래가 끝나고도 40분이 넘도록 오지 않은 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면 빨래방에서 두 시간은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짜증이 아니라 미안해해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
무례히 행하고도 전혀 미안해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싶고 세상에 꼭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뉴스를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큼직큼직하게 일어나는 일들 구석구석엔 여전히 따뜻하고 뭉클한 소식이 많다는 걸 안다. 타인에 대해 예의를 지키고 타인을 향해 따뜻한 마음으로 손 내미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함께 기다리던 셋 중 한 명은 커플과 같은 나이대의 남학생이었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씩씩거리는 것 하나 없이 끝까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에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흐뭇했다. 혼자 그 청년의 앞길을 응원했다.
두 커플이 언젠가 그날을 기억할 때 제발 돌이키고 싶은 부끄러운 순간으로 기억하면 좋겠다. 자기 잘못을 알고 미안해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리니까 봐준다 하며 넘기려 해도 생각할수록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그들의 전부는 아닐 거라 믿는다. 나 또한 이제 좀 성숙해진 것 같다가도 또다시 성숙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어제보다 덜 부끄러운 하루를 살아가길, 그런 2024년이 되길, 어디서든 내가 빌런은 되지 않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