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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Nov 28. 2023

이웃집 시루떡


바람 참 방자하게 분다. 누군가 가장자리로 모아둔 시간을 저리도 어지르다니. 숯불에 구운 김처럼 바삭해진 낙엽. 바짝 뾰족해진 낙엽 모서리가 이마를 툭 건드리고 간다. 조금 따끔하다. 그래도 기분 좋다. 금요일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제 바람도 겨울이다. 집에 가면 작년에 세탁해 둔 롱패딩을 꺼내야겠다. 가을 코트는 다시 세탁소로. 가을 옷 사기 아깝다. 툭 걸치기 좋은 가을 코트 참 좋아하는데.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 참 좋아하는데. 아쉽다. 세탁비 아까워서 입으려다 그대로 걸어놓은 옷도 몇 벌 된다.


불어 제치는 바람에(정말이지 불어 제쳤다) 눈물 흘리며 퇴근했다. 바람 불면 눈물 난다. 정확하게 진단받진 않았지만 안구건조증이거나 눈물흘림증일 것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눈이 시려서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베이스 화장에 공들였는데 가오나시처럼 양 볼에 눈물길이 생긴다. 불어 제치는 바람과 낙엽 무리에 두들겨 맞으며 집에 도착했다.


공동현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는데 1층 현관 손잡이에 떡이 걸려 있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301호입니다. 이사 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한동안 출입문 안내 게시판에도 301호 이웃이 써놓은 글이 붙어 있었다. 인테리어 때문에 시끄러울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손글씨로 쓴 A4용지였다. 가끔 휴가 내고 늦잠이라도 자려면 드르르르르르 공사 소리에 깨곤 했다. 그래도 아침에 출근해서 운동까지 하고 집에 왔으니 공사 소음으로 크게 힘든 건 없었다.


2층 계단을 오르는데 위층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손에 떡 봉지가 있었다. 이사 왔어요 하고 나에게 건넨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쑥스러운 미소를 주고받았다. 서로 구부정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떡이 아직 따뜻했다. 이사 떡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요즘에도 떡 돌리는 사람이 있구나, 집에 들어와 떡봉지에 붙은 포스트잇 글씨를 한번 더 쳐다봤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1인 가구로 살면서 이사만 네 번 했다. 생각해 보니 그리 많이 한 것도 아니다. 5평 원룸에서 시작해 1.5룸을 거쳐 투룸에 살고 있다. 여러 집을 거치면서 옆집 이웃과 전혀 관계 맺지 않고 살아왔다. 원룸에 살 땐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사회초년생이어서 서로 마주치더라도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인사는커녕 서로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딱 한번 옆 집 사는 이웃과 친해진 적이 있었는데 집에 비가 새서였다. 그때 살던 집은 신축 빌라였는데 깨끗해서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한 층에 두 집 밖에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옆집은 비어있었기에 한동안 나 혼자 한 층을 다 썼었다. 몇 개월 후 옆집에 내 또래 여성분이 이사 왔고 서로 조용했고 마주칠 일도 없어 있는 둥 없는 둥 지냈었다. 가끔 퇴근해서 집에 들어갈 때 우리 집에선 전혀 맡아볼 수 없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서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먹고 싶다 생각하곤 했다.


비가 오던 날 조용하던 벨이 울렸다(혼자 살면 벨소리가 무섭다). 옆집이었다. 우리는 현관문을 열어 놓고 비 문제로 하소연했다. 우리 집은 그나마 베란다만 비가 샜었는데 옆 집은 방에도 비가 샜다. 주인 할머니가 얼마나 능글맞은지 고쳐준다고 하고선 결국 이사 나갈 때까지 비가 샌 채로 살았다. 비가 샐 때마다 우린 속상함을 털어놓았다. 누구의 집에라도 들어가서 얘기해도 됐을 뻔 한데 그건 부담스러웠는지 서로 현관문을 열고 복도에 서서 한참을 하소연하곤 했었다. 복도 전등이 꺼질 때마다 우린 번갈아가며 손을 허우적거리며 불을 켰다.


옆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오면 너무 시끄러운 건 아닌지 조심스레 메시지가 왔다. 나는 괜찮다며 마음껏 편하게 얘기해도 된다고 답장을 보냈다. 모르는 사이였다면 왜 이렇게 에티켓이 없어하고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선을 잘 지키며 편안하게 잘 지냈다.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조용했으며 서로에게 전혀 예민하지 않았다. 이사 가던 날,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선물을 건넸다. 인연이 계속 이어지진 않았지만 같은 스트레스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위안이 됐던 것 같다.


딱 이 정도의 관계가 좋다. 옆집 사람과 너무 친밀하게 지내는 것도 왠지 부담스럽다. 서로의 생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각자 살아가는 것이 좋다. 정이 없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도움과 배려가 필요할 때 모른 척하지 않으면서 각자가 그어놓은 경계에 섣불리 침범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다정한 이웃으로 살고 싶다.

아직 뜨끈한 떡을 만지며 나는 무얼 갖다 주지? 생각했다. 3일이 지났는데 아직 못 정했다. 뭐가 좋을까. 따뜻해지기 참 좋은 계절,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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