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기다린다. 요즘 지하철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기다리던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출입문 앞까지 사람들로 빽빽하다. 제발 다음 열차 타세요, 하고 쳐다보는 눈빛들. 직장인들은 서로 아침을 지켜줘야 한다. 출근이 힘든 건 모두가 똑같다. 누구 한 명 인상 쓰면 덩달아 기분 나쁘고 기분 나쁠 만한데도 예의 지키는 사람을 보면 경직된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나는 지하철을 타면 의도적으로 얼굴 근육을 위로 올린다. 웃는 근육으로 만든다. 얼굴이 편안해지면서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누가 툭 치고 가더라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다.
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지하철 안도 빽빽, 승강장 밖도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으면 아침부터 기운이 탈탈 털린다. 출근도 안 했는데 퇴근하고 싶어진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지하철 문이 열린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지하철로 들어간다. 타고 타고 또 타고. 더는 못 탈 때까지 탄다. 승강장에 남은 사람들은 다음 열차를 기다린다. 나는 출입문 앞쪽 손잡이 쪽에 가오리처럼 납작하게 붙어서 눈을 감는다. 다음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면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희한하다. 분명 내가 탄 지하철역에선 사람들이 못 탔는데 이번 역에서 사람들이 또 탄다. 여름은 얘기가 다르겠지만 가끔 폭신한 패딩 사이에 꽉 껴서 압박당하면 편안함을 느낄 때도 있다.
지하철에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사람이 싫어질 때가 있다. 뒤에서 밀고, 어깨 툭 치고, 들어올 때부터 나 건들지 마시오 하고 인상 쓰고 있으면 그 기운이 나한테까지 퍼진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자꾸 흔들어서 내 얼굴을 때리면 정말이지 괴롭다. 그래서 나는 패딩이나 외투 모자에 붙은 털을 다 떼고 다닌다. 혹시나 이 털 때문에 뒷사람이 불편할까 봐서다. 어쨌든 하루하루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에 마음이 완전 뺏길 때도 있지만 또 그런 순간들 때문에 힘이 날 때도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스크린도어를 쳐다보며 멍 때리고 있는데 건너편 승강장에서 허우적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 여자가 가슴 쪽에 팔을 바짝 붙여 우리 쪽 승강장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환하고 밝던지. 또 반갑게 인사하던지. 스크린 도어 두 개를 뚫고 선명하게 내 눈에 포착되었다. 내가 손 흔들어 인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여자의 인사는 내 옆쪽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한 것이었다. 스크린도어에 비친 남자를 보니 그도 귀엽게 손 흔들고 있었다. 둘의 모습이 참 예뻤다.
수족관 유리에 찰싹 붙은 가오리처럼 출근하는 동안 인사하는 사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사람이 싫으면 인사하는 게 힘들다. 인사엔 마주 대하거나 헤어질 때 예를 표함,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 이름을 통해 자기를 소개함, 입은 은혜를 갚거나 치하할 일 따위에 예의를 차림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어쨌든 인사는 예를 표해야 하는데 싫으면 예를 표하기 싫기 때문이다. 단단히 삐졌는데 어떻게 예가 나오겠는가. 화나는데 웃으면서 인사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인사는 습관처럼 가볍고 또 자연스럽게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때로 오장육부가 뒤틀릴 만큼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일은 좋아해야만 가능하다. 나는 그렇다. 마음을 숨기고 반가움을 표할 수도 있지만 그 미묘한 감정을 사람들은 다 안다. 많이 반갑던, 조금 반갑던, 인사를 주고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긴 한다. 가끔 속이 꽁해있는 날엔 먼저 인사하기 자존심 상한다. 그래도 그 뒤틀림을 참고 인사하면 꽁꽁 묶여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풀어진다. 추운 겨울 홀짝이는 어묵 국물처럼 몸과 마음을 녹인다.
가벼운 눈인사도 좋고, 와락 껴안는 포옹도 좋고, 악수도 좋고, 예의 갖추며 허리 숙이는 인사도 좋다. 아이들의 배꼽 인사는 웃음을 전염시키고, 하이파이브하며 깔깔 웃는 인사도 좋다. 인사가 너무 반가운 사이라면 그건 서로 좋아한다는 거다. 누구든 언제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사람을 계속 좋아하고 싶다.
우리는 만나면 안녕? 하고 묻고
헤어질 땐 안녕, 하고 말해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부탁인 말이 안녕이에요.
(중략) 안녕해주세요.
안녕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안녕이 되고 싶어요.
_ 이현승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생일 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