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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Jan 09. 2024

사라지는 세계에서도 삶은 흐른다

김성중 소설 <『개그맨』(문학과지성사, 2011) 중 「허공의 아이들」>

Pixabay로부터 입수된 愚木混株 Cdd20님의 이미지 입니다.



집이 떠오르고 사람들이 사라진다. 이 상황을 설명해줄 어른들 모두 사라지고 아이들만 한 세계에 남았다. 아이들은 이런 재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어른이 되어 간다. 육체가 자라면서 정신도 성장한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허공)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것(소멸)이라니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옮겨진 걸까, 사라진 걸까”. 소년과 소녀는 “선택된 걸까, 누락된 걸까”(20p). 소멸이 미래가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없어진다. 의미가 사라진 삶에 무엇이 남을까. “불길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가 파괴할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소년을 부추겼듯이”(19p) 파괴만 남을 뿐일까. 집이 떠오르고 땅이 꺼지고 음식은 부패하고 한때 꿈꾸었던 미래가 모두 사라진 세계. 그런 세계에서도 아이들은 살아가고 어른이 된다. 하루하루 재앙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소멸의 사전적 의미에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는 기화하는 것이든가 원자나 분자 단위로 분해되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이론의 핵심에서도 세상은 진공으로 텅 비어 있고, 그 속에 원자라는 입자들이 모여 만물을 이룬다고 했다. 원자들은 그저 법칙에 의해 모였다가 흩어질 뿐 거기엔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다고.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라진 사람들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가 다시 원자로 흩어져 흙이 되었거나 소년과 소녀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있는 곰팡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사라지는 중일까 새로운 존재로 다시 이합집산 되는 것일까.     


"원자의 집단이 갖는 자연스런 상태가 죽음이다. 생명은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자로 되어 있지만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 생명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니 우주 전체를 통해 보면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생명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충만한 우주에 홀연히 출현한 생명이라는 특별한 상태.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잠시 생명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바다출판사, 2023), 194p>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두 생명. 언젠가 소멸될 것을 기다리는 일 밖에 확실한 것이 없는 세계에서도 살아있는 생명에게 일상이라는 삶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끝장나는 세계뿐이었지만 그래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존재했고 살기 위해 생존의 필수품을 가지런히 쌓아두거나 남녀 사이의 본능적인 끌림도 존재했다.


허공에서 살 것인지 땅으로 내려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26p) 싶지만 그런 세계에서도 소년과 소녀는 성장했다. 사라질 때까지 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끝이 죽음이지만 그걸 알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듯이. 소년과 소녀는 각자의 방법으로 소멸의 시간을 견디는 중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겨질 사람에게 세계가 소멸되고 자신이 소멸되는 것보다 공포였다.


“너를 좋아해. 어느 밤에 소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 너를 좋아해. 소녀는 분명히 해두겠다는 듯이 한 번 더 똑바로 말했다. 소년은 기쁨에 사로잡혔지만 즉시 겁에 질렸다. 이 고백이 남아 있을 그에게 지옥을, 소녀가 없는 세계에서 소멸을 맞기까지 그리움의 지옥을 불러일으킬 주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소년은 두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소녀를 바싹 끌어안았다.”(30p).


점점 투명해지던 소녀는 소년에게 부탁한다. 잠들면 꼭 깨워달라고. 소멸의 순간을 기억하고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싶은 것이 소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습관이 된 불면, 혹독한 추위, 혼곤해지는 의식, 곧 혼자가 될 거라는 공포와 싸우다 잠들어버린다. 그리고 소녀가 완성해 놓은 3천 피스짜리 퍼즐을 보며 소녀의 소멸이라는 또 다른 재앙을 만났다. 소년은 소멸되는 세계에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


집이 구름을 뚫고 떠올랐다. 그 사이 세계에 유일했던 소녀도 사라지고 소년만 남았다. 곧 소년도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과 세계를 기억하는 존재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런 재앙 속에서도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소년은 홀로 남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까지 겪어낸다.

마지막으로 남은 땅이 무너진다. 이제 남은 건 소년의 소멸 밖에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도 뼈가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삶은 사라지는 세계에서도 그렇게 계속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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