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중 「육 인용 식탁」>을 읽고
한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모든 사람이 거짓을 말한다면, 진실을 말하는 한 사람이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된다. 과연 ‘나’와 윤의 아내는 바람을 피웠을까. 누가 거짓말 하는 것인가. 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따라가며 진실이 무엇인지 추측하다가 결론에 이르러서는 내가 쫓은 것이 무엇이었나 허탈하고 찝찝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고 퉁 친 느낌이었달까. 미제 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처럼 그동안 놓친 것을 찾아 다시 사건이 일어난 현장으로 들어갔다.
사건은 늦가을에 떠난 세 부부의 피크닉에서 시작됐다. ‘나’와 윤의 아내가 호수의 다리를 보러 간 그 짧은 시간. 찰나에 벌어진 사건이 관계의 균열을 일으켰다. 호수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윤의 아내뿐. 한의 부부와 윤은 그곳에 없었다. ‘나’의 아내는 그 시간 카페 호수에 있었지만, 호수에 있던 둘을 정말 본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와 윤의 아내가 서로 키스했는지 바람을 핀 건지도 끝까지 알 수 없다.
이 사건이 시작된 피크닉 얘기도 누가 꺼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인데 이 사건을 최초로 건드린 사람을 밝히지 않는다. 어쩌면 관계를 깨트리는 건 큰 사건 한방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미세 균열이 일파만파 분포되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이 끝까지 해결하지 않은 사건 하나는 실제 일어났는지 누군가의 거짓말인지조차 밝히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그 사건으로 관계가 깨진 것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진작에 깨져있던 관계였을지도.
그런 장면은 소설 곳곳에 보인다. 주인공 부부 집에 초대받은 윤과 한 부부가 집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육 인용 식탁이었다. 늦가을에 떠난 피크닉 이후 눈 내리는 겨울에 만난 부부들이다. 일반적으로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서 가장 먼저 하는 건 안부 인사를 건네거나 반갑게 맞이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전혀 없다. 모두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 있다. 서로에 대한 관심도 전혀 없는 듯하다. 윤이 준비한 선물 코히바 시가도 ‘나’는 무엇인지 모른다. 모르지만 묻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한 부부는 어떠한가. ‘나’의 아내가 남편과 윤의 아내가 바람피우고 있다고 했을 때 두 가정이 깨지고 있는데도 그저 관람객처럼 재밌게 관망할 뿐이다. ‘나’가 그만 가달라고 했을 때 술이 남았는데 하며 아쉬워하는 장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세 부부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세 부부가 함께 피크닉을 가고 한 가정집에 초대되어 파티를 여는 것은 웬만한 관계에선 하기 힘들지 않은가.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육 인용 식탁의 묘사처럼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실이 꽉 찰 만큼 거추장스러운, 2인 가구 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섯 명이 앉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평소에는 벽에 붙여 놓는, 버릴 수도 없지만 사용하기에도 편치 않은, 하지만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좋은 식탁.
“직사각형의 식탁은 여섯 명이 앉고 남을 정도로 거대하다. 식탁의 상단은 산호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중앙에는 길쭉하게 이탈리아산 월넛 무늬목이 코팅되어 있다. 식탁의 하단은 최고급 너도밤나무인데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식탁 의자의 쿠션은 최고급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모두 여섯 개다. 사실 우리 집에 놓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평소에는 벽에 붙여놓아서 될 수 있으면 적은 공간을 차지하도록 만드는데, 오늘은 모처럼 친구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거실 중앙으로 내놓은 것이다.”
_「육 인용 식탁」, 140p
꽉 막힌 해피엔딩을 좋아하고 결론이 선명한 이야기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이 소설의 결말이 충격적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렇기에 읽을수록 상상력이 무한대로 퍼져나갔다. 한 사람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듯 이 소설 역시 단지 바람을 피웠는지 안 폈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로 정리할 수 없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분위기도 특별했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배경, 공간이 한국임에도 외국 소설 특유의 분위기가 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레이먼드 카버의 「춤추지 않을래」가 떠올랐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자신의 마당에 내놓는다. 그리고 집 안에 있을 때와 똑같이 세팅해 놓고 마당을 바라본다. 한 커플이 벼룩시장을 하는 줄 알고 마당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다.
한 남자의 마당에 등장한 커플, 육 인용 식탁에 둘러앉은 세 부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집, 그리고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긴장감과 섬세한 인물 묘사가 닮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서도 “뭔가 더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말로 할 수는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끊임없이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고 어디 한 번 해석해 보라는 식의 이런 소설은 다 읽고 나면 썩 반갑진 않지만, 자존심 상하게 계속 생각난다. 그렇게 소설을 재차 읽으며 마음에 가득한 의심과 찜찜함을 해결해보려 했으나 우연히 발견한 손보미 작가의 인터뷰에서 또 한 번 속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꽤 후련했다.
“처음 육 인용 식탁을 쓸 때 그냥 길을 가다가 아내가 남편에게 포크를 집어던지고 욕을 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 장면이 극적이려면 부부가 양 끝에 앉고 손님들이 있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식탁에 사람들을 놓고 소설을 쓴 거였다. 아내가 가장 화를 낼 만한 일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일이겠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쓰다 보니 잘 모르겠더라.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지 안 피웠는지. 그래서 마지막이 그렇게 된 거다. 나도 모르니까.”
_문학과지성사 「웹진문지」 손보미 작가 인터뷰 中.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가보니(157p)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과 관계도 그렇다. 잘 지내야 하기에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벌어질 만큼 벌어진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관계가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한순간을 만드는 것은 찰나의 시간에 벌어진 미세한 균열의 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