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중 「레이먼드 카버, 춤추지 않을래」
소설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사건은 부엌에서 ‘술을 한 잔 더’ 따르고 마당에 나와 있는 침실 가구 세트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건조하고 특별할 것 없는 마당의 풍경은 소설의 마지막을 읽고 나면 의미 없이 쓰인 문장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집 안에서 집 밖을 쳐다보는 남자처럼 서사의 진행은 생기 없지만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있다. 남자는 상자 세 개를 제외한 모든 물건을 집 밖에 내놓았다. 무슨 사연인진 모르지만 ‘그가 눕던 쪽, 그녀가 눕던 쪽’이라는 짧은 단서로 가정의 파탄을 짐작하게 한다. 술을 한 잔 더 따르던 남자는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을까. 집 밖의 물건을 집 안에 있을 때와 전혀 다름없이 작동하도록 한 것 역시 평범하지 않다.
“가끔 자동차들이 속도를 늦추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라도 멈추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p.99)
남자의 시선이 끝나는 지점까지 사건 발생 전의 상황을 진술하듯 적혀 있다. 그리고 하나의 공간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 남자의 관조적 시선과 자동차 속도를 늦추고 쳐다볼 만큼 흥미로운 시선.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배경이 시작된다. “마당에서 벼룩시장을 하나봐”라는 여자애의 말로 남자의 공간에 한 커플이 들어선다. 이때부터 독자는 속도를 늦추고 마당을 바라보는 자동차 안의 사람처럼 그들을 쳐다보게 된다.
둘은 차에서 내려 어떤 물건을 살지 살펴본다. 엄연한 타인의 공간에서 남자애는 조금은 경계하듯 이것저것 만지다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여자애는 신발을 벗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남자애에게도 누워보라 말한다. 남자애는 침대가 어떤지 묻고 주위를 둘러본다. 집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니 이내 여자애 옆에 눕는다. 이젠 키스까지 해달라는 여자애. 기분이 별로라던 남자애는 곧 윗몸만 일으키고 앉아 TV를 보는 척한다. 그리고 다시 집에 누가 있는지 보고 온다고 말한다. 작가의 한 줄 띄우기로 집 밖에 나가있던 남자는 샌드위치, 맥주, 위스키를 들고 집 앞에 도착해 집 안에 있는 커플을 본다.
데이비드 민스는 이 소설에 대해 “작가는 한 줄 띄우기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한 줄 띄우기라는 빈 공간은 텍스트로 보여주지 않은 배경과 서사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시의 언어처럼 느껴진 건 꼭 단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다. 죽기 1년 전 인터뷰에서 “시와 소설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소설과 시를 같은 방법으로 쓰고 그 효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단편소설과 시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보다 가까운 관계”라고 말했다.
어쨌든, 홀로 술을 한 잔 더 따르며 마당의 물건을 바라보던 남자는 소파에 앉아 그 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셋은 함께 술을 마신다. 그리고 남자는 뜬금없이 “너희, 춤추지 않을래?”라고 제안한다. 남자애는 또다시 별로라며 거절하지만 어느새 춤추고 있다. 음악이 끝나자 레코드를 뒤집는 남자. 남자애와 여자애의 춤이 끝나고 새로운 음악이 시작된다. 춤추자며 남자애에게 다가가던 여자애는 남자에게 안겨 춤을 춘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걸 의식한 여자애에게 남자는 “괜찮아, 내 집인걸, 춤 춰도 돼.”라고 말한다.
집 밖에 있는 물건들은 집 안에 있을 때와 전혀 다름없이 작동하고 구조 또한 비슷하게 세팅되었지만, 물건이 있어야 할 곳은 아니다. 마당에 내놓은 물건들과 집 안에 있는 단 세 개의 상자는 소중한 것을 잃은 남자의 공허한 내면 같다. 그 안에 들어온 남자애는 시종 별로라며 시큰둥하지만,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반면 여자애는 그 공간에 들어왔을 때부터 마치 제집처럼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눕는다. 비정상적인 공간 안에서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망각한 채 점점 혼미해져 간다.
‘끝나버린 관계’, ‘술’은 작가 레이먼드 카버 인생에서 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살기 위해 술을 끊어야 했을 만큼 술에 젖어 살았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첫 번째 삶은 술에 젖은 나쁜 레이먼드, 그 이후 삶은 좋은 레이먼드 시절로 구분했다. 「춤추지 않을래」는 술을 완전히 끊고 재혼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가운데 쓴 것이다.
작가는 과거의 자화상 같은 이 소설에서 인물에 대한 어떤 감정의 개입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객관적 사실만을 진술한 듯한 서술방식으로 독자 스스로 그들의 내면을 해석하게 한다. 작가가 의도를 품고 독자를 끌고 가려 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행동만으로 인물의 심리를 짐작하게 한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는 작가답게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생략에서 독자의 상상력은 무한대로 퍼져나간다. “뭔가 더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말로 할 수는 없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처럼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소설은 “말했다. 말했다.”로 진행되지만 말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하나의 진실만 담겨 있고 그건 차마 말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된다. 이야기는 몇 주가 지나고 남자와도 남자애와도 관계가 끊어진 듯한 여자의 말로 마무리된다. 계속 말하고 모두에게 말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로 할 수 없어서 더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