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 안.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안 듣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통화 내용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들어보니 은퇴를 앞둔 직장 상사가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을 한 것 같다.
“나이 들어 그 부서라도 간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
듣기에도 민망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틀딱’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젊은 남성의 통화를 어르신들이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나는 ‘틀딱’이라는 단어도, ‘꼰대’라는 단어도 싫다. 발음해보면 입안에 무거운 압력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고. 혈기 대단하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때론 화도 나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나는 어르신들을 좋아한다. 숱한 세월을 겪고, 셀 수 없는 인생의 문턱을 넘어본 자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 몸을 숙여 땅만 바라보며 걷는 어르신들을 본다. 검은 봉지와 쇠 집게를 들고 길거리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는 어르신들을. 자식들 앞길에 좋은 것만 두고 싶은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잠깐 스치는 시간에도 좋은 마음이 넘실거린다. 담배꽁초 대부분은 술자리에서 잠깐 나와 무리 지어 담배를 피우던 젊은이들 것이다.
꽃바구니, 옷 뭉치, 뭐가 들었는지 궁금한 길쭉한 가방 등을 매고 어디론가 배달 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여전히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에 잊고 사는 존경이라는 감정을 그제야 느끼기도 한다. 나는 힘없이 늙어버린 어르신들을 보며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루지 않았어도 그분들의 삶이 실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며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그분들의 삶은 위대하니까.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도 불분명한 속어들이 딴딴하게 똬리를 틀고 우리 삶에 자리 잡은 걸 보면 낯설기도 하고 반갑지가 않다. 특히 꼰대라는 단어가 그렇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꼰대의 기준이 뭘까.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건 아닐까. 어르신들의 말이 잔소리처럼 들리고 시대에 뒤처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틀딱, 꼰대라는 말로 그분들의 자리를 위축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양치질하는 내내 물을 틀어 놓은 것처럼 20대를 낭비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20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나조차도 하나 둘씩 생긴다. 이래라저래라 한 적은 없지만 이제야 하는 후회를 그들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언젠가 스스로 깨달을 날이 오겠지 하며 넘기지만 그들을 아끼기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다. 언제나처럼 차고 넘치는 마음이 새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는다.
꼰대라는 단어가 언제든 누구에게든 달려들 것 같다. 한번 위축된 마음은 좀처럼 펴지지 않는 듯하다. 자꾸만 말을 아끼고, 함께하는 시간에도 비켜 앉은 어르신들을 볼 때면 이 단어에 짓눌려 있는 듯하다. 꼰대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의 자리를 빼앗더니 ‘3~40대 젊은 꼰대가 문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기 영역을 확장했다.
이 ‘되기’가 우리를 마구잡이로 한 칸에 몰아넣는다.
살 만큼 살았으니 자리를 넘겨주어야 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칸으로
_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그렇게 물러가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모두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인생에 나이테가 한 줄 두 줄 깊어질수록 외로움도 깊고 진해진다. 나이 말고 그저 ‘나’이기를 바라는 어르신들의 자리를 잠깐 내어드리면 안 될까. 손님처럼 왔다가 못내 아쉬운 마음 감추며 일어날 그분들의 자리를.
그 단어가 많은 사람에게 일반화되는 것이 아쉬워서 쓴 글입니다. 글을 쓰고 보니 저는 좋은 어른만 만난 것 같습니다. 마침표를 찍고 주변을 돌아보니 어디선가 괴로운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