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송이가
라로 시작했다. 악기를 조율할 때 기본음이 되는 ‘라’ 음. 레 레도 시라. 아르페지오로 연주되는 피아노에 맞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 상글상글. 여기 함께 있어서, 함께 노래할 수 있어서, 우리 틀리지 말고 연습한 대로 잘하자며 말없이 오가는 대화가 보였다. 노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음이 녹아버렸다. 이날을 위해 준비했을, 구김 하나 없는, 때 묻은 곳 하나 없는 새하얀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맞춰 입고 가슴에 72 지희순, 54 이현옥, 72 안상수, 63 김혜경… 이름표를 붙였다.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커피 한잔하자고 불러.
동네 한 번 걷자고 꼬셔.
넌 한 번도 그래 안 된다는 말이 없었지.
화려한 퍼포먼스 없이 그저 간단한 손짓만으로 의미가 되어 가슴에 날아왔다. 봄바람 타고 이리저리 흩날리다 마침내 내 두 손안에 폭 들어온 꽃송이처럼.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래그래 피었네.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 꽃 한 송이가 그래그래 피었구나.
미끈하고 아름다운 말 수만 마디보다 한 번의 몸짓, 한 번의 눈짓이 더 위로되는 것처럼. 한 번 마주 잡은 손의 온기와 한번 꽉 안은 서로의 마음이 더 위로되는 것처럼. 울지 말라고 말하기보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처럼. 더 필요한 게 없을 만큼 위로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눈물 흘렸다. 새어나가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켰다. 목구멍으로 짠맛이 넘어왔다. 지금 눈물을 참지 못하면 목소리도 표정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코와 머리가 아팠다. 아마 옆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면. 울어? 라고 물었다면 나는 터진 쌀자루에서 쌀이 우르르 떨어지듯 그렇게 울었을 것이다. 막을 새 없이.
이 곡은 꼬시는 곡이다.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배드민턴 치잔다. 단대 호수 걷잔다. 여자도 싫지 않은지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말이 없단다. 속을 감추고 겹겹이 쌓여있던 꽃송이가 점점 열리는 모습을 여자의 마음에 비유한 앙큼한 노래.
통통 튀는 귀여운 구애 곡에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울었다. 왜 그럴까. 가사도 멜로디도 바뀐 것이 없는데. 단지 72, 54, 63이라는 숫자 때문일까. 아니면 중장년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무엇이 그렇게 위로되었을까. 얼마만큼 특별한 건 지라고 부르며 서로 손바닥을 마주친다. 그리고 곧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라라 타라라 라라라라 라라 타라라 라라라라.
72 지희순 님과 72 안상수 님이 무대 앞으로 나왔다. 지희순 님이 안상수 님의 어깨를 토닥였다. 백발의 신사가 고개를 꾸벅. 고맙다고 인사했다.
가슴을 울렸다. 노래를 부르는 모두의 얼굴이 갓 깨어난 봄 같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의 얼굴도 포근하게 녹아있었다. 처음 듣는 낯선 곡에 소울을 넣기까지 힘들었다는 말이 아름답게 떨어졌다. 누군가의 마음에 소울을 떨어트리기까지 얼마나 불렀을까. 한음 한음 아름답게 쌓아 올리기까지 서로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였을까. 흩날리는 꽃송이를 표현하느라, 거리의 사람들을 표현하느라 얼마나 서로 손을 맞추었을까. 얼마나 서로 손을 마주 잡았을까. 얼마나 토닥였으며 얼마나 꾸벅 인사했을까.
꽃송이가 꽃송이가. 서로 한곳으로 모이더니 주섬주섬 무언갈 집었다. 이게 하이라이트야 최대한 숨기는 듯했지만 무엇을 준비했는지 다 보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았다. 색색의 종이를 사고 손수 그리고 오리고 붙여서 만든 초록의 잎들, 얼굴이 쏙 들어가는 커다란 꽃송이, 그 옆에서 파르르 파르르 날고 있는 나비. 그리고 꽃 같은 얼굴들. 웃었다. 모두를 향해 너무도 밝고 환해서 빛났다. 잊히지 않을 하모니였다.
1도 3도 5도가 쌓여 화음이 되듯이. 높은음, 중간음, 낮은음이 모두 나란히 있듯이. 우리도 옆에서 아름답게 쌓여가면 좋겠다. 높고 낮음 없이 나란히 함께. 약속된 곳에서 약속된 시간에 만나 서로의 소리에 정답게 녹아들면 좋겠다. 그래그래. 그렇게 함께 꽃 피우기를.
높고 낮음 없이 나란히 함께 꽃 피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