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가깝다고 하기에 애매하긴 했지만, 학교 앞 문구점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걷다 보면 집이었다. 빨간 벽돌집엔 매일 BYC – 인지는 모르겠으나 - 런닝만 입고 집 앞에 나와 있던 아저씨가 살았고, 골목 안쪽 집엔 교회 친구네가 살았고, 큰길 중간엔 내 이름을 지어주신 한약방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가는 길은 눈 감고도 걸어 다닐 정도로 익숙한 곳이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다.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했는데 교복을 입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일처럼 낯설었다. 매일 8시 30분쯤 나와 느긋하게 등교했는데 갑자기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야 했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7시엔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30분 정도를.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황금의 터라고 불렸다. 교통편이나 위치가 좋아서가 아니라 남중, 남고가 우리 학교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이게 뭐라고 주변 여중에서 그렇게 부러워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 가는 버스는 어디에서 타든 늘 만원이었다. 아침에 밥 넘기는 게 힘들었던 나는 가방에 200mL 짜리 흰 우유를 꼭 챙겼는데 만원 버스 출입문에 가방이 끼는 바람에 우유가 터진 날도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은 정말이지 아침부터 기운이 탈탈 털렸다. 더는 태울 수 없을 것 같은데 문을 열면 사람이 타고 타고 또 탔다. 책장에 조금의 틈도 없이 꽂혀있는 책처럼 손잡이를 잡지 않았음에도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버스 정류장은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꼭대기에 있었다. 그 길을 쭉 내려오면 육교가 보이는데 이 육교를 건너면 내려온 길보다 긴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학교 정문까지 대략 20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무거운 책가방도 멨으니 이건 마치 행군이었다. 아마 하루 만보는 거뜬히 걷고도 남았을 거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키 작고 마른 몸의 내가 버티기에 무척 버거운 등굣길이었다. 체육 시간에 쏟아지는 햇빛을 올려보다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결국 쓰러졌다. 신경성○○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아늑하고 편안함에 눈을 떴다. 동네 병원이었다. 팔에는 링거주사가 꽂혀있었고 엄마가 내 교복 상의를 두 손으로 안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링거액 마지막 방울이 떨어지고 주삿바늘을 뺐다. 침대에서 일어나 엄마가 입혀주는 교복 상의를 입다가 또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시간이 엄마에겐 참 길었을 것 같다.
병원에서 나와 엄마와 나란히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붕어빵 가게가 보였다. 말없이 걸어가던 중 엄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붕어빵 사줄까?”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가 낯설었는데 좋았다. 그때 엄마는 가족에게 다정할 여유가 없었다. 우리 엄마처럼 고운 사람이 없는데 가족을 지키느라 몸도 마음도 쉴 겨를이 없었으니까. 붕어빵 사줄까 이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죽는 줄 알았다”
내가 죽는 줄 알았다는 건지, 엄마가 죽는 줄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엄마가 사준 붕어빵을 감싸 들고 엄마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혼잣말도, 내게 건넨 말도 아닌 아리송한 그 말에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흰 종이봉투에 담긴 붕어빵이 뜨겁고도 축축해졌는데 꼭 내 마음 같았다.
한 입 한 입 오물거리며 엄마를 따라 집으로 가던 길이 겨울임에도 춥지 않았다. 뜨거운 단팥과 엄마의 말이 온몸에 따뜻하게 퍼져나갔다.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아마 붕어빵 가게 아저씨가 실수로 팥을 넣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