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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Feb 14. 2022

아빠와 롤 케이크

초등학교 3학년,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갑자기 배가 사정없이 쪼여왔다. 지각해서 운동장을 50바퀴쯤 뛰고 난 뒤의 뒤틀림이 이럴까. 내 몸은 공처럼 동그랗게 말려 상체를 도저히 펼 수 없었고 배를 부여잡고 꼼짝도 못 한 상태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맹장염이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맹장이 터질 뻔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침대에 누워 주위를 둘러보니 채혈을 위해 주사기를 들고 서 있는 간호사 언니와 걱정스러운 모습의 엄마가 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핏줄이 얇아 채혈하는데 애를 많이 먹고 종종 손등에서 채혈하는데 그날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만큼 아팠다. 병원에서 무슨 조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파서 떼굴떼굴 굴렀는데도 멀쩡히 집으로 돌아갔다. 내 기억으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수술을 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게다가 수술 전날이 하필 내 생일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수술을 앞둔 딸을 위해 그날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를 사 오셨다. 아니 왜? 분명 금식인 걸 알고 계셨을 텐데. 생애 첫 케이크를 앞에 두고 먹지 못하다니 너무 억울했다.      


“오늘은 축하만 하고 수술 끝나면 같이 먹자”

엄마와 아빠가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다. 그날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누구도 케이크를 먹지 못했다. 차라리 퇴원 기념으로 케이크를 사 오셨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케이크에 온 신경을 집중한 탓인지 집안에 케이크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참다 참다 참지 못해 가족 몰래 설탕 인형에 묻은 생크림을 두세 번 핥아먹고 다시 꽂아놓았다. 쫄쫄 굶어 배가 아주 고팠는데 그 달달함에 허기가 채워지는 듯했다. 


아무도 먹지 못할 케이크를 굳이 왜 사 오셨을까. 딸이 먹지 못한다는 걸 알고도 케이크를 사 온 아빠의 마음을 나는 이제 온전히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날만큼은 꼭 생일 케이크를 사주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을.






아빠는 생일이면 항상 롤 케이크를 사 오셨다. 당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셨던 아빠의 최선이었다. 아빠가 사 온 케이크가 정사각형이 아닌 직사각형의 길쭉한 상자에서 기차처럼 나올 때 나는 잠깐 실망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그날의 기억에서 그때의 실망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아빠가 사 온 롤 케이크, 그 옆에 엄마 그리고 나보다 더 들뜬 동생들. 가족이 함께 모여 생일을 축하하던 장면이 롤 케이크에 박힌 건포도처럼 반갑고 달달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케이크를 사주신 것이다.

     

“은희야, 이게 생일 케이크보다 훨씬 맛있는 케이크다”

아빠의 주문이다. 딸이 실망할까 봐 아니면 딸에게 미안해서인지 항상 걸었던 주문. 롤 케이크였지만 아빠는 잊지 않고 초를 꽂아 주셨다. 그때의 주문이 먹혔는지 실제로 나는 케이크보다 롤 케이크를 더 좋아한다. 


엄마, 아빠에 대해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자녀는 얼마짜리 선물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던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 내게 아빠의 롤 케이크가 그랬다. 아빠의 최선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그 사랑을 풍족하게 먹고 자랐다. 


그런데 잠깐, 어쩌면 아빠는 진짜 롤 케이크가 생일 케이크보다 맛있어서 사 온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케이크 종류가 많지 않았다. 생크림 이외의 케이크라고는 모카 크림 케이크만 떠오르는 거로 봐선 케이크가 정말 맛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 딸의 기분보단 역시 맛이 더 중요한 아빠일 수도 있었겠다. 내가 아빠 딸이고 보니 우리 아빠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


어쩌면 아빠는 딸에게 정말 더 맛있는 빵을 먹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변하지 않는 건 아빠는 내게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케이크를 사주셨다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딸의 모든 생일날 것까지 이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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