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야, 제주도에 계시는 목사님이 니가 쓴 글 잘 읽고 있다고 하시더라”
“아니, 어떻게? 알려드리지도 않았는데?”
“페이스북으로 보셨다는데, 잘은 모르겠다”
SNS는 전혀 하지 않고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알리지 않았음에도 도대체 어떤 경로로 보게 된 건지 궁금했다. 어느 늦은 밤엔 익숙한 이름이 연속으로 내 글에 라이킷을 눌렀다. 회사 동생이었다.
'이 아이는 또 어떻게 알았지? 브런치 유명한 거 나만 몰랐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엔 아빠도 내 브런치 글을 다 읽으셨단다. 다들 어떻게 보는 건지 궁금하던 차에 카카오톡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우연히 알게 됐다. - 페이스북은 여전히 모르겠다 -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면 카카오톡에 공유하기 버튼이 뜬다. 카카오 스토리나 카카오 채널을 통해 공유되는 줄 알았던 나는 둘 다 하지 않으므로 아무 의미 없이 버튼을 클릭했었다. 그게 이렇게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연결될 줄은 몰랐다. 퇴고하지 않은 글 대부분이 가족 이야기라 당분간은 카카오톡에 공유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아빠가 엄마한테 한번 읽어 보라는데 보면 울끼다 하더라”
“부끄럽다~~~~ 엄마는 읽지 마라~~~”
“뭐 어떻노, 아빠는 니가 이런 거를 어찌 다 기억하고 쓰냐고 놀라더라”
엄마와 통화를 끝내고 내가 올린 글의 제목을 살피며 내용을 떠올려봤다. 혹시 아빠 마음을 아프게 한 글이 있을까 걱정됐다.
엄마, 아빠가 내 글을 안 봤으면 하는 이유는 하나다. 마음 아프실까 봐. ‘느그 엄마는 부엌데기다’라는 글이 사랑의 편지에 실렸을 때도 소식만 전할 뿐 제목도 내용도 보여드리지 않았다.
다 지난 일인데 뭐 어떠냐는 엄마 말에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디자인된 시안을 보내드렸다. 그 글을 읽은 엄마에게서 “우리 딸 자랑스럽다”는 문자가 왔다. 내가 보낸 글과 엄마가 보낸 문자가 참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알림이 떴다. 뜨헉. 아빠가 101번째 구독자가 되셨다. 101번째 프로포즈도 아니고. 하하. 이 글을 쓰는 현재 99명으로 구독자가 줄었지만.
아빠가 보고 있다. 과연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거르고 거르다 보면 쓸 수 있는 글이 많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요즘에도 여전히 인기 있는 드라마 소재인 부잣집 딸과 가난한 집 딸이 바뀐 드라마를 보며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상상했던 적이 있다. 만약 내가 어마어마한 부잣집 딸이라면 지금 엄마 아빠를 두고 따라갈 것인가를 말이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엄마, 아빠를 두고 절대 갈 수 없다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없는 부잣집은 내게 아무 의미도 매력도 없었다. 엄마, 아빠가 어떤 모습이든 내겐 엄마, 아빠 자체가 이유이자 의미였기 때문이다. 다음 생을 믿지 않지만 만약 다음 생에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의 엄마, 아빠, 동생과 또다시 가족이 될 것이다.
자라면서 유복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슬프기도, 불안하기도, 원망하기도 했다. 때때로 엄마, 아빠가 밉기도 했다. 하지만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복작대던 다섯 식구는 20살이 된 내가 독립하면서 오랫동안 네 식구로 살았다.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느라 서로를 돌보고 삶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사실 나는 내가 없는 시간 동안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속속들이 모른다. 아마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일거다. 떨어져 지내기에 서로에게 바라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아프지 않는 것. 그 하나가 별일 없이 잘산다는 안부가 되었다. 서로 말하지 않은 별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혼자 보내던 시간, 만나지 못했던 날들을 이제라도 글로 채워보려고 한다. 엄마, 아빠를 혼자 추억하지 않기로 했다. 내 글에 초대해 함께 추억하고 싶다.
그러니 부디 내 글을 읽는 엄마, 아빠가 어떤 것에도 미안해하시거나 마음 아프지 않으시길 바란다. 아픔과 상처를 쓰는 게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쓰는 거니까.
엄마, 아빠. 사랑해요.
내 쌍둥이 동생들도.